케네디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설명한 타인의 고통에 대해 행동을 촉구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혜택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큰 책임과 의무를 갖고 있지 않을까요? 그 책임은 미국 정부가 아니라 우리각자에게 있습니다."
미국인 전체가 전쟁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이 있다고도 했다.
"다른 사람을 가리키며 ‘그 사람들이 결정한 거야. 내 책임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선출되거나 임명된 정부의 관리들은 여러분의 이름을 걸고 일합니다. 그들이 전쟁을 벌일 때는… 여러분의 미래를 위해 하는 것이고, 실제로 미국인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케네디는 베트남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사건들을 이야기하며 미국인 각자의 책임과 결부시켰다. 가령 베트남의 벤쩨라는 마을을 지키기위해 마을을 파괴해야 했다고 말한 어느 미군 장교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 그 장교는 자기를 위해 한 일이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위한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미국인을 위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도덕의 문제이고, 안보의 문제입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 모두의 문제이며, 미국인인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 P136

징병에개한 질문을 받자 케네디는 자신은 직업군인제도를 원한다고 했다. 징병이 ‘불공평하고 불공정‘하다며,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추첨징병제를 지지하며, 대학생을 위한 징병 유예제도는 대학등록금을 감당할 수 있는 부유층에 대한 혜택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면서 "결국 전쟁 수행의 부담을 지는 사람들은 빈곤층"이라면서 "대학생을 위한 징병 유예를 도덕적으로 변호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번에는 건장한 남학생 하나가 발코니에서 일어섰다. 유세에 참석한 20명에 불과한 흑인 중 한 명이었다.
"케네디 의원님, 저는 의원님께서 만든 제안과 정책에 동의합니다. 의원님께서는 백인 사회가 그걸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전적으로 신뢰하고 계십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미국의 백인 사회를 그렇게 신뢰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케네디는 크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저는 흑인 사회도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양측 모두에 극단주의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고, 극소수의 백인들만이 흑인들을 평등하게 대하는 데 반대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 대부분은 미국에서 정당하고 옳은 일을 하기를 원합니다." - P139

연설을 시작하기 전, 케네디는 연단에 있던 사람 중 한 사람에게 "사람들이 킹 목사 소식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 누군가 "아마 들었겠지만 자세히는 모를 거예요"라고 답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의원님께서 직접 전달하실 수 있도록 따로 알리지는 않았습니다."
케네디가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은 제가 일 분 정도로 짧게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몹시 슬픈 소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트럭과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 몇몇은 케네디의 심각한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오해했는지 계속 환호하고 팻말을 흔들고 있었다. 케네디는 팻말을 내려달라고 요청하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모두에게 아주 슬픈 소식이고, 모든 미국인, 그리고 평화를사랑하는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도 슬픈 소식입니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총에 맞아 숨을 거두셨습니다."
현장을 목격한 한 사람의 표현에 따르면 케네디가 말을 마친 직후청중의 모습은 번개가 내려치기 직전, 혹은 대포 포탄이 터진 후 공기가 빨려들어간 순간을 보는 듯했다. 청중들은 "아아"하고 큰 신음을 냈고,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두 블록 떨어진 곳에서 차를 타고 지나가던 한 여성이 케네디가 무슨 말을 했기에 청중이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궁금해 할 정도였다. 남자들은 욕을 내뱉었고, 여자들은 절규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흐느꼈다. "오, 맙소사!", "안돼!"라고 외치는 사람도있었다. 바깥쪽에 있던 일부 청년들은 격분해서 자리를 떠났고, 어떤이들은 허공에 주먹을 치켜들며 "블랙 파워!"라는 구호를 외쳤다. - P148

링컨 대통령은 첫 취임사에서 "우리 본성에 깃든 보다 선량한 천사의 손길이 다시금 우리의 심금에 닿게 될 때, 반드시 올 그날에, 연방찬가가 한층 드높게 울려 퍼질 것입니다"라는 말로 희망을 표현했다.
인디애나폴리스 연설에서 케네디는 "이 나라의 대다수의 백인과 대다이 땅의 모든 사람이 정의를 누수의 흑인들은 함께 살기를 원하고리기를 원합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링컨이 이야기한 "보다 선량한 천사"를 끌어내려 했다.
로버트 케네디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킹 목사 암살 사건으로 그가 형 케네디 대통령 암살을 생각할 것을 알았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형의 일을 언급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케네디의말에 다들 깜짝 놀랐다.
상원의원 선거운동을 할 때까지만 해도 케네디는 케네디 대통령이암살된 "11월 22일"이나 "댈러스"라는 말을 꺼내기를 거부했고, 심지어 사석에서도 형의 암살을 "1963년 11월에 일어난 일"이라고 에둘러말했다. 암살 사건을 조사한 워렌위원회 보고서도 직접 읽기를 거부하고 보좌관에게 대신 읽고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해 달라고 했다. 케네디는 암살범의 이름인 "오즈월드"라는 말도 입에 담기 힘들어서 "정부가 지목한 그 사람이 범인이고, 그의 단독 범행이라는 보고서 결론에 동의합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날 케네디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는 아무도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형의 암살을 언급했다. 존 루이스는이 연설을 "놀라울 정도로 강력했고, 청중과의 연결점을 만들어 주었고, 정서적으로도 진실한 행동"이었으며, 케네디가 이 연설을 통해 청중과 즉각적인 유대를 형성했다고 생각했다. - P155

이날 케네디는 미국의 주요 정당의 대선 후보로서는 가장 급진적인 발언을 했다. 케네디는 폭력과 인종 문제를 분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폭력에 희생되는 사람들은 흑인과 백인, 부자와 가난한 사람, 젊은이와 노인, 유명인과 이름 없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누구나가 아니라 그들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는 킹 목사 암살범과 폭도를 동일시했다.
"저격범은 영웅이 아니라 겁쟁이일 뿐이죠. 통제되지 않은, 통제할수 없는 폭도는 이성의 목소리가 아니라 광란의 목소리일 뿐입니다."
폭도들이 아직 경찰이나 군인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던 시점에, 그리고 케네디가 민주당의 대선 후보 지명을 받기 위해서 지지가 꼭 필요한 시카고의 데일리 시장이 시카고 경찰에 방화범을 사살하고, 약탈자를 상대로 폭력을 써도 좋다고 명령한 시점에, 폭도의 폭력과 사법기관의 무차별적인 폭력은 도덕적으로 차이가 없다고도 했다.
"법의 이름으로 행해진 살인이든, 법에 저항하며 행해진 살인이든, 한 사람에 의한 살인이든, 집단이 한 살인이든, 계획된 살인이든, 아니면 흥분한 상태에서 한 살인이든, 폭력에 의한 살인이든, 폭력에 대응하다가 일어난 살인이든 상관없이, 한 미국인의 생명이 다른 미국인에의해 불필요하게 희생되는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수치입니다."
170 - P170

케네디는 시티클럽 회원에게 미국 문화와 외교 정책이 폭동 유발의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득히 먼 나라에서 민간인이 대량 학살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별 느낌 없이 받아들입니다. 영화나 TV 화면에 등장하는 살인을미화하고 그걸 오락이라고 부릅니다.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않은 사람도 총기와 탄약을 얼마든지 손쉽게 살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힘을 과시하고 큰소리치고 무력을 사용하는 사람을 찬양합니다. 타인의 꿈을산산조각내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사람을 너무 쉽게 용서해줍니다."
마지막으로는 기업 문제에 관한 관심을 표명하는 연설이었음에도 클리블랜드 기득권층의 핵심 그룹에 해당하는 청중에게 그들이 속해있는 기업과 공공기관에도 책임이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종류의 폭력이 미국에 존재합니다. 이 폭력은 천천히 일어나지만 밤에 일어나는 총격 사건이나 폭발만큼이나 치명적이고 파괴적입니다. 그것이 기업과 기관의 폭력입니다. 무관심과 복지부동, 그리고 서서히 진행되는 부패입니다. 그것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폭력입니다. 이런 폭력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학교에 책을 주지 않고, 가정집에 난방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서서히 파괴합니다. 이런 폭력이 한 개인을 아버지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일어설 기회를 주지 않음으로써 그 사람의 기를 꺾어놓습니다." - P171

그리고 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각 지역을 다니면서 공항에서 ‘여러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나 ‘이곳에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같은 뻔한 말이나 하고 있다고 나무라기도 하죠. 하지만 시끄럽고 풍선으로 가득한 유세장에서 연설하면서 2~3일을 보내면 한 번쯤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을 알려줄 기회가 생겨요. 저처럼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기회가 없어서 알지 못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들려줄 기회인 거죠.
저의 경험을 통해서 도심 빈민가나 인디언 보호구역처럼 직접 가보지않은 장소에 간접적으로 가보게 하는 거죠."
뻔한 말을 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면서도 선거운동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그런 순간이었다. 1967년 여름 폭동으로 뉴저지주 뉴어크와 미시건주 디트로이트가 쑥대밭이 된 후 케네디는 프랭크 맨키위츠에게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방송사를 설득해 가난한 흑인들의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데 협조해달라고 하겠다고 했다.
"그 사람들이 사는 곳의 소리와 느낌, 절망, 그리고 그곳에서 절대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게 어떤 기분인지 방송으로 보여주는 거죠."
"수업에 빠지지 말고 학교를 졸업하라는 공익광고를 듣는 흑인 10대 소년 하나가 그 말대로 학교를 졸업하고도 직업이 없는 형을 쳐다보는 장면을 보여주고, 마피아가 마약을 파는 장면을 보여주고, 몰래카메라 팀을 도심 빈민가에 있는 학교에 투입해서 교육 시스템이 얼마나 썩었는지 실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추위와 쥐의 공격으로부터 아기를 보호하려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엄마도 보여주고요. 그러고 나서 시청자들에게 역사상 가장 부유한 사회에서 희망이 없는 삶이 어떤 건지 보고 느껴보라고 권할 겁니다."
케네디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국민이 변화를 요구할 거라 믿었다. - P174

소위 반발 유권자backlash voters의 전형은 백인 블루칼라 노동자였다. 대개 성혁명 sexual revolution과 젊은이의 나이 든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분위기, 대학 캠퍼스에서 벌어지는 소란스러운 일, 도심 지역의 흑인범죄 등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가톨릭 신자와 동유럽계 백인이 그런 반발 유권자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중 다수는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흑인 동네에 인접해있는 북부 도시나 인근 교외 지역에 거주하고 있어서 흑인의 정치적, 경제적 성장에 위협을 느꼈다. 이들에게는 ‘법질서‘라는 말이 호소력이 있었다. 이 말에는 도심 빈민가에서의 엄격한 법 집행을 요구하고 흑인들을 이런 지역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라는 주장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 P226

히코리 힐 미팅에서는 케네디가 다시 인디애나주로 가서 선거운동을 할 때는 미국 법 집행 기관의 수장 역할을 했던 점을 강조하기로 합의했다. 백인 청중은 케네디가 폭력과 폭동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말로 안심시키고, 흑인 청중은 불의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안심시키되, 양측에게 두 메시지를 모두 전달하기로 한 것이다. 인디애나주의 보수적인 민주당원에게 호소하기 위해 케네디가 상원에서 취한입장도 강조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복지제도 개혁과 기업에 인센티브를 제공해서 가난한 도심 지역에 일자리와 주택을 공급하게 하는 것과지방 정부와 조직에 연방 사업의 집행 권한을 더 많이 부여하는 것 등이 포함되었다. 몇몇 정치평론가는 이런 이슈에 대한 케네디의 입장을배리 골드워터 (1964년 대선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민주당 존슨 대통령에게 크게 패한 정치인옮긴이)와 비교했고, 케네디가 리버럴한 유권자가 많은지역에서 보수적인 정치인으로 행세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준비한 연설 뒤 질의응답 시간에 케네디는 도시 빈민 지역에 기업 투자를장려하기 위한 세금공제에 찬성하지만, 효과가 없으면 마지막에는 정부가 고용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또한 가난한 가정의 아버지가 직업이 없고 집을 소유한 경우 불이익을 주는 복지 시스템안에 존재하는 편견을 없애기를 바라지만, 우주 개발 프로그램이나 베트남 전쟁 비용 충당을 위한 복지 예산 삭감에는 반대했다. 그리고 거대한 연방 관료제가 지방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막는다고 생각했지만, 그와 동시에 연방정부는 소외계층을 도울 의무가 있고 경제적 최상류층에 유리한 조세법의 구멍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 P228

그날 제임스 부인의 집 밖에서 기다리던 기자와 보좌관들도 케네디가 프리티 보이를 만나는 것과 원주민에 대해 집착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애를 썼다. 로버트 케네디의 인디언 문제에 대한 관심은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 시절에 시작되었다. 케네디는 당시 미국 법무부가 일상적으로 인디언의 부동산 권리 청구를 법정소송으로 끌고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곧장 해당 정책을 수정해서 인디언 권리를 아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 결과 1963년 노스다코타주 비즈마크에서 열린전미인디언회의에서는 케네디를 인디언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브레이브하트라는 인디언 이름을 지어주었다. 케네디는 그 자리에 모인 90개인디언 부족의 대표에게 인디언이 사회적·경제적 억압에 묶여 있다며이런 상황은 "국가적 불명예"라고 했다. 그러고는 존 F. 케네디 행정부가 인디언에게 더 나은 주택과 교육, 의료 서비스, 직업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정신적인 응급처치" 이상이 되지 못하고,인디언은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케네디는 1965년 상원의원에 당선 뒤 업스테이트 뉴욕을 방문해 인디언이야말로 "자기 땅에서 인종차별을 당한 희생자" 라고 했다. 케네디는 인디언 손도끼, 화살, 벨트를 너무 많이 모은 나머지 의원 사무실이 인디언 천막 내부처럼 보였고, "인디언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것 같다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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