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우린 조금 슬프고 귀여운 존재

누구나 한번쯤 억울해서 죽을 것 같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몇날 며칠 잠을 못 자고, 악몽을 꾸고, 위장병이 도지고, 10년넘게 끊었던 담배에 다시 손을 대기도 하고, 폭음과 폭식의 나날을 보냈던 경험 말이다. 어느날 인터넷에 ‘억울하다‘를 검색해보았는데, 사람들은 별별 이유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어떤 글에는 사연에 공감하는 수백수천개의 댓글이 달리기도했다. 억울한 마음은 불공평하거나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때 더욱 커진다. 오랜 노력이나 희생이 물거품이 되었을 때, 실수나 잘못에 비해 과한 처벌을 받았을 때 누구나 억울하고 분하다. 어떤 억울함은 며칠 밤잠 설치는 것으로 훌훌 털어버릴 수 있지만 어떤 억울함은 한 사람의 인생을 끝장내기도 한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은 억울함을 끌어안은 사람들을 만났다. - P4

그 시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진정인의 비슷비슷한 거짓말을 수도 없이 들은 후에야 그 새빨간 거짓말 속에 어떤 일말의 진실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인생을 꿈꾸며 산다. 내가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다른 가정에서 자랐다면?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혹은 했다면? 그러면 다른 삶 속에서 더 괜찮은 사람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말이다. C도 가끔은 현재의 밑바닥 인생‘과는 다른, 괜찮은 인생을 살아보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 다른 인생에서 C는 술이나 마시고 행패나 일삼는 허드레 심부름꾼이 아니라 근사한 중국집의 어엿한 주방장이 아니었을까? C는 내게 자신이 꿈꾸던 다른 인생 속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그 말을 믿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꿈꾸던 인생 이야기를 누군가 눈을 반짝이며 진지하게 들어주었을 때, 그 상상의 이야기를 멈추기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자신이 이야기하는 방향대로 삶이나아지기를 인권의 이름에 기대어 희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희망에 기대어 한번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 진심을 조사관이 믿어주길 바랐던 것일까. 국밥 한그릇을 비운 남자가 벌게진 얼굴로 "그게 아녜요..… 그런 게 아녜요..." 하던 말끝에 그런 마음이 들어 있었다고 믿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 P25

핀란드를 비롯해 스웨덴, 덴마크,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위스 등 소위 선진국의 여러 나라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수벌금제‘라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일수벌금제는 벌금행위자의 수입에 따라 벌금을 다르게 부과하는 제도다. 일수벌금제가 잘 정착된 핀란드에서 한 기업의 대표가 속도위반을 해우리 돈으로 2억원 가까운 벌금을 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벌금과 소득을 연동하는 방법은 같은 범죄 행위에 같은 처벌(형량)을 해야 한다는 법의 원칙을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좋은방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시민단체에서 이제도의 실행을 요구하고 있지만 ‘법의 공정성‘을 흔든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논의에만 머무르고 있다. - P47

2003년 박찬욱 감독은 찬드라의 사연을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었다. 그는 이 이야기를통해 인권침해에 고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잔인한 고문을 행하거나 진실을 조작해 무고한유학생을 간첩으로 만드는 것 같은 고의와 악의가 있는 인권침해 사건들도 많지만, 그런 고의나 악의만이 인권침해 피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사실 갈수록 무관심과 관행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인권침해가 더 늘어나고 있다. 찬드라의 인권침해사건에 ‘참여‘했던 경찰, 부녀자보호소 직원, 정신병원의 의사와 간호사 누구도 의도를 가지고 악행을 하지 않았다. 그냥 조금씩 무심했고 조금씩 무책임했을 뿐이었다. 찬드라의 외모가 한국인처럼 보였고, 한국말을 못했고, 행색이 초라했다는 것은인권 보호의 이유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가해의 좋은 변명거리가 되었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 촬영 중에 사비를 들여 찬드라의 고향을 찾아갔다. "당신이 찬드라입니까?"라는 물음에 찬드라가 환한 미소로 응답하던 순간을 감독은 네팔의 아름다운 산을 배경으로 스크린 가득 담아냈다. 한국사회의 편견과 차별속에서 있으나 없는 것처럼 취급되었던 찬드라가 네팔의 거대한 산만큼이나 분명한 존재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P50

2019년에 어떤 종목의 성인 운동선수 30명을 대상으로 포토에세이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포토에세이 인터뷰는 이름 그대로 참가자들이 찍은 사진을 매개로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이다. 참가자들에게 일회용 카메라를 나누어준 후 일주일 동안폭력 경험과 연관 있다고 느껴지는 사물이나 순간을 찍어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일회용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은 임의로 사진을 삭제하거나 편집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사진을 받아보면 스물일곱장의 사진 중 적어도 한두장에는 솔직한 진심이 담긴다고 이 분야 연구자는 말했다.
과연 인화된 수백장의 사진 더미 속에서 진심이 느껴지는사진들은 금세 눈에 띄었다. 야구방망이, 자물통, 초시계, 로커룸, 텅 빈 운동장, 커튼으로 가려진 방, 아파트 단지 안에 버려진 자전거들••• 폭력의 경험을 조용히 진지하게 응시했던 순간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폭력의 도구가 되었던 사물들이 찍혀 있기도 했고, 폭력을 당할 때의 심리 상태나 과도한 훈련으로 소진된 몸과 마음을 상징하는 사진들도 많았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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