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10일 밤 10시, 상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金神父)에 자리잡은 허름한 셋집에 우리 독립투사들이 모여들었다. 중심 의제는 임시정부 조직이었다. 타인들이 정부를 조직하자는 데 대해 몽양은 당조직을 주장하였다. 정부라면 체면을 유지하여야 할 터인데 현재 형편으로는 체면을유지하기가 곤란하고, 또 정부라면 명의가 크고 무거워 운영이 곤란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정부를 주장하는 쪽 이유는민심을 강화시키고 일본에 대한 반항의 의미가 크다는 것이었다. 몽양의 주장은 현실론이요, 다른 이의 주장은 이상론이었다. 결국 다수의견을 따라 정부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다음은 국호다. 몽양은 ‘대한‘을 반대하였다. 이유인즉, 대한은 우리나라에서 오래 쓴 역사가 없고 이조 말에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한을 주장하는 편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는 것이었다. 이것도 다수의 의견을 따라 대한이 채택되었다.
몽양은 또 황실우대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황실을 우대하자는 주장은 이러했다. 고종이 죽은 뒤에 대한문 앞에 백성의 곡성이 창일(張溢)하였다. 이것을 보면 아직도 민심이 황실에 뭉쳐 있으니 민심수습상황실을 우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몽양은 대답했다.
"동지들은 대한문 앞 곡성을 잘못 들었다. 망국의 울음을아무 때나 울면 잡혀갈 처지였기 때문에 참고 있다가 핑곗김에 기회를 얻어 운 것이요, 황실 그 자체를 생각한 울음이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주사상과 혁신정신이 앞서 있는 모양의 주장이완고한 독립운동가들에게 먹혀들어갈 리가 없었다. 역시다수의 의견에 따라 가결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장 제8조에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이라는 조문을 넣게 되었다.
다음에는 수반(首班)문제로 격론을 벌였다. 일본과 국내에서 온 사람들은 이번 독립만세운동의 33인을 중심으로 해서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국외에서 독립운동을벌여온 해외파에서는 한일합병 이후 해외로 망명하여 목숨을 내걸고 싸워온 독립투사들이 마땅히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반문제에서의 대립은 더 노골적이 되었다. - P105

여기서 잠깐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의동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과 하와이에 산재한 동포들로 조직된 ‘대한인국민회‘에서는 이승만 · 정한경(鄭翰景)·민찬호(閔贊鎬) 세 사람을 선정하여 파리강화회의에대표로 파견코자 하였으나,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기 때문에 미 국무성에서는 그들의 여권을 발급해주지않았다.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그들은 3·1운동 직전에 독립 대신 위임통치 및 자치 문제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몇몇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신석우가 이승만이 적임자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순간 사학자 단재(丹齋) 신채호가 천부당만부당이라고 소리치며 열기를 뿜었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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