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에게 가장 끔찍한 건 ‘의사소통‘ 항목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읽지 못한다. 글을 쓰지 못한다. 언어 사용이 중단된다.‘ 오진이 아닌 이상 그녀는 이 항목에서는 제외될 수 있는 가설을세울 수가 없었다. 이 항목은 그녀가 알츠하이머병 환자인 이상 그녀에게 적용될 수밖에 없었다. 앨리스는 책꽂이의 책들과 정기간행물들, 책상 위에서 채점을기다리는 기말시험지 뭉치, 메일함 속의 이메일, 전화기의 깜박이는 빨간 메시지 표시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소에 늘 읽고 싶었던 책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읽으리라 생각하고 침실 책꽂이 맨위 칸에 따로 모아놓은 그 책들을 떠올렸다. 『모비 딕』. - P107
"앨리스, 제 설명 이해하시겠어요?" 스테파니가 물었다. 그 상황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앨리스는 화가났다. 그녀의 질문에서 미래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자신과 그녀가 나누는 대화를 보는 듯했다.
나는 대화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을까? 이해했다고 대답하기엔 뇌 손상이 너무 심하고 정신이 혼미한 결까?
지금까지 앨리스의 대화 상대들은 그녀에게 커다란 존경심을보여왔다. 하지만 병이 그녀의 훌륭한 정신을 점점 갉아먹게 되면사람들은 그녀에게 커다란 존경심 대신 어떤 태도를 보일까? 연민? 겸손? 당혹감? - P122
앨리스는 자신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양말 속에 넣었다. 물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모를 정도로 정신이 흐려지면 그 쪽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기억이 안 나겠지만 어쨌든 예방 조치는 취해놓기로 했다. 머리를 맑게 해주는 달리기의 효과도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사실 요즘 그녀는 온갖 질문들에 대한 답을 쫓아 끝없이 달려가고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힘껏 달려도 그것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 P139
"이런 병에 걸려서 정말 미안해, 여보. 상태가 얼마나 더 악화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해. 언젠가는 당신을 보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얼굴을 보면서도 누군지 모를 거란 사실도 견딜 수가 없어." 앨리스는 두 손으로 남편의 턱과 눈가 주름을 어루만졌다. 그의이마에 맺힌 땀과 눈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런 생각만 하면 숨을 쉬기조차 힘겨워 하지만 우린 앞으로의문제에 대해 생각해야만 해. 앞으로 얼마나 더 당신을 알아볼 수있을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얘기해야만 해." 존은 술잔을 기울여 술이 한 방울도 안 남을 때까지 마시고 얼음이 녹은 물까지 빨아들였다. 그리곤 앨리스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겁에 질린 깊은 슬픔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어." - P145
"아, 그럼 다음 주에 임신이 될 수도 있어요!" 앨리스는 꽉 깨문 이 뒤로 두려움을 가두고 억지로 격려 어린 미소를 보냈다. 알츠하이머병의 증세는 가임기가 지나고 돌연변이유전자가 다음 세대에 전해진 후에야 나타난다.
만일 내 몸의 모든 세포에 이 유전자가 이 운명이 들어 있다. 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자식들을 낳았을까, 아니면임신을 피했을까? 자식을 얻기 위해 기꺼이 감수분열의 주사위를 굴리는 모험을 감행했을까? 나의 호박색 눈 존의 매부리코, 나의 PS1 유전자. 물론 지금은 안나와 톰, 리디아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식들이 태어나기 전이었다면, 그리하여 부모가 되기 전엔 알 수 없는 자식에 대한 원초적인 사랑을 체험하기 전이었다면, 그랬다면 차라리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을까? 안나라면어떨까? - P148
"미안하다." 그녀가 말했다. "엄마, 괜찮을 거예요. 엄마 말처럼 예방 치료법이 나올 거예요" 안나가 말했다. 앨리스는 나중에 그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니 안나가 돌연변이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었다. 안나는 적어도 겉으로는 가장 강해 보였다. 식구들 중에서는 언제나 위로하는 역할을 맡지 않았던가! 하지만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닌지도 몰랐다. 안나는 엄마를 가장 많이 닮은 딸이니까. 안나는 엄마의 머리칼과 눈동자 색깔, 기질을 빼닮았다. 그리고 PS1까지. "시험관 아기는 계속 시도할 거예요. 담당 의사와 얘기했는데 배아에 대한 착상 전 유전자 진단을 하겠대요. 각 배아의 세포 하나씩을 검사해서 돌연변이가 없는 배아만 착상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아이들은 돌연변이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건 분명 좋은 소식이었다. 모두들 그 달콤한 소식을 계속 즐겼지만 앨리스에겐 달콤함이 약간 씁쓸함으로 변했다. 그녀는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안나를 시샘하고 있었다. 자식들을 위험에서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안나가 부러웠다. 안나는 자신의 딸, 자신의 첫 아이 앞에 앉아서 언젠가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리게 될 거라는 사실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딸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된다. 앨리스는 자신에게도 그렇게 배아를 선택할 수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면 안나로 탄생될 배아는 버려졌을 것이다. 톰은 스테파니 애런에게 음성 반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도기쁜 얼굴이 아니었다. 충격에 빠진창백하고 나약한 표정이었다. 앨리스는 두 아이 중 하나라도 음성 반응이 나오면 다른 감정이섞이지 않은 순수한 안도감을 느끼게 되리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랜 세월과 DNA, 사랑으로 묶인 가족이었다. 안나는 톰의 누나였다. 안나는 톰에게 껌을 딱딱 소리 나게 씹는 법과 풍선껌 부는 법을 가르쳐줬고 꼭 핼러윈 사탕을 챙겨줬었다. "리디아한테 누가 말하지?" 톰이 물었다. "내가" 안나가 말했다. - P157
현관문에 이르렀을 때 방광에서 긴급한 압박감이 느껴졌고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앨리스는 황급히 복도를내려가서 화장실 문을 열었다.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눈앞에 나타났다. 그곳은 화장실이 아니었다. 빗자루, 대걸레, 양동이, 진공청소기, 간이 의자, 연장통, 전구들, 손전등, 표백제. 그곳은 창고였다. 앨리스는 더 아래쪽을 보았다. 왼쪽에는 부엌, 오른쪽에는 거실이 있었다. 그게 다였다.
1층에 작은 화장실이 있었는데, 아닌가?
분명 있었다. 바로 여기. 하지만 화장실이 아니었다. 앨리스는황급히 부엌으로 갔지만 그곳엔 문이 하나뿐이었고 뒤 포치로 나가는 문이었다. 그녀는 거실로 달려갔지만 물론 거실엔 화장실이딸려 있지 않았다. 그녀는 도로 현관으로 달려가 현관문 손잡이를잡았다. "아, 제발, 아, 제발, 아, 제발."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마술을 부리는 마술사처럼 현관문을 활짝 열었으나 화장실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내 집에서 길을 잃을 수가 있지?
그녀는 2층 화장실로 뛰어올라갈 생각도 해봤지만 황혼 지대와같은 화장실 없는 1층에서 이상하게도 발이 묶여 어쩔 줄 모르고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 현관에서 울고 있는 가련하고 낯선 여인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어른의 조심스러운 울음이 아니었다. 겁에질리고 좌절한 어린아이의 억제되지 않은 울음이었다. 그녀의 몸이 더 이상 담아둘 수 없는 액체는 눈물만이 아니었다. 때마침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온 존이 오줌 줄기가 그녀의 오른쪽다리를 따라 흘러내려 트레이닝바지와 양말, 운동화를 적시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여보, 보지 마!" - P212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포옹하며 키스를 퍼붓고 찬사를 보냈다. "어찌나 멋지고 아름다운지." 앨리스가 말했다. "고마워요." "올 여름에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을까요?" 앨리스가 물었다. 캐서린은 불편할 정도로 그녀를 오래 응시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아뇨 올 여름엔 이 작품밖에 안 해요." "여름 동안만 여기 온 건가요?" 앨리스는 그 질문만으로도 슬퍼졌는지 눈에 이슬이 맺혔다. "네, 8월 말에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요. 하지만 가족을 만나러 이런 식으로 자주 올 거예요.‘ "엄마, 리디아예요. 엄마 딸." 안나가 말했다. - P2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