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파리강화회의에 진정서를 개인 자격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단체 명의로 보내야 할 터인데 마땅한 단체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여운형은 부랴부랴 40여 명을 규합하여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했다. 여운형이 총무간사로 피선되었다. 따라서 신한청년당 이름으로 진정서를 보내기로 했다.
이것이 국제회의에 처음으로 이름을 내놓은 독립운동단체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당이다. 진정서의 내용인즉 "한일합방이 강도적인 것이며, 일본이 한인을 정치·경제 · 교육 · 종교로 압박하고 착취하여 못살게 굴고 있으므로 기어코 독립하여야겠다"는 것이었다.
두 통의 진정서는 크레인과 밀러드에게 각각 전달되었다.
대표로는 그 당시 천진(天津)에 체류하고 있던 김규식(金奎植)이 만장일치로 결정됐다.  - P82

신한청년당은 일본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재일 유학생들에게 독립운동을 종용한다. 1차로 조소앙(趙素昻), 2차로 장덕수, 3차로 이광수를 파견하여 재일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을 준비하도록 한다. 장덕수는 유학생들로부터 8백 원을 모금하여 상해 조동호에게 보낸다. 재일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은 국내 3·1운동의 전주곡이된다.
이상에서 신용하 교수의 논문을 간략히 훑어본 바와 같이 신한청년당이 국내와 국외에서 3·1독립운동을 추동거사케한 활약상은 우리나라 근대사 전개에서 하나의 찬연한 장을이룬다. 신용하 교수의 ‘신한청년당은 3·1운동의 진원이요 뿌리다‘라는 학술적 단정의 의의는 자못 크다. 신한청년당의 대표는 여운형이므로 ‘3·1운동의 뿌리는 여운형이다‘라는 삼단논법적 결론이 유도되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 P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