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안되는 케이스야."
내게 헛된 희망을 심어주지 않으려는 연하의 마음이 아프게 밀려왔지만 나는 지지 않고 밀어붙인다.
"안 돼도 해. 되는 것만 어떻게 하면서 살아. 안 돼도 해.
적어도 내가 장애인은 절대 안 된다는 엄마한테... 세상에나 하나밖에 없는 엄마한테 널 선택한 이유에 대해 당당히 말할 수 있게! 엄마, 연하는 포기를 몰라요, 세상 누구보다강해요! 그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게."
참으려 했지만 눈물이 쏟아졌다. 단단한 벽을 치고 나를밀어내던 연하의 눈빛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벽이었을 것이고, 내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이젠 그런 벽 뒤에 숨어 서로의 감정을 속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소모는 지난 삼 년으로 충분하다.
흔들림 없이 단단해진 내 마음을 알겠다는 듯 연하가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그의 눈빛에 먹먹함이 담겨있다. 나는 냅킨으로 눈물, 콧물을 닦아냈다.
"소설 끝나는 날 올게. 엄마한테 책 선물로 주고 그게 엄마 소원이거든."
차를 마시며 잠깐 생각에 잠겼던 연하가 진짜 속마음을 꺼냈다.
"안 오면... 죽는다. 진짜." - P106

슬로베니아에 돌아와보니, 다시 오는 건 쉽고 가볍게 느껴졌다. 어떤 길이든 그 길에 들어서기 전이 가장 두려운 법이다. 한발 내디뎌 내 발자국으로 길을 내고 보면, 그 길 위엔 나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괴물이 숨어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괴물은 언제나 내 마음이 만들어내는 상상 속 두려움일 뿐이다. - P108

삶의 한 자리에 죽음이 들어와 탐욕스럽게 자신을 노려보고있는데, 그것과 싸울 무기조차 없다는 얘기를 들으면  살며 갈고닦은 긍정성조차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 P260

난희가 회자를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언니 내가 암이래."
회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난희를 돌아보았다.
"많이 크대, 암이, 내일병원 들어가 진짜."
애써 웃어 보이는 난희를 회자가 와락 끌어안았다.
"어떡해 어떡해…."
희자가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난희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는다. 이를 어쩌나, 이 젊고 예쁜 애를 어쩌나싶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언니가 나보다 낫다 생각해라. 나는... 나는... 언니보다 내가 낫다 생각할게. 우리 그냥 그렇게 생각해버리자."
난희는 다시 회자를 안고 웃으려 애썼다.
"이제야 좀 위로가 된다. 병자끼리 있으니까."
난희와 희자는 그렇게 서로를 안았다. 서로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고, 하필 왜 나한테 이런 병이 온 건가 하는 분노와 아픔이 전해지고, 자기 품에 안긴 아픈 여인의 애틋함이 가슴속 깊이 전해져왔다. - P332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부모가 자식을 더 사랑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 말은 부모 된 입장에 선 사람이 한 말일 거다. 우리 자식들의 잘못은 단 하나. 당신들을 덜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영원히, 아니, 아주 오래 우리 곁에 있어줄 거라는 어리석은 착각. 아마도 그것이 아닐까. - P347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왜 나는 지금껏 그들이 끝없이죽음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다만지난날 자신들의 삶을 열심히 살아온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을 너무도 치열하고 당당하게 살아내고 있는데…. 어차피 처음에 왔던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거라면 그 길도초라하지 않게 가기 위해 오늘도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가고있는데….
다만 소원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조금 더 오래가길,
아무런 미련이 남지 않게 조금 더 오래가길 기원할 뿐이다.
친애하는 나의 늙은 친구들이여!
‘Bravo your life!‘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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