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내가 그녀들의 이야기를 쓰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생각은커녕 냉정하고도 극렬한 저항이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할머니 이야기로 신춘문예에 당선해 데뷔 작가라는 직함을 얻었고, 지금은 번역에 매달려 겨우 작가로서 명맥을 이어가는 처지지만 그녀들의 이야기만은 사절이었다. 엄마가수없이 미끼를 던지며 나를 자극해도 난 끄떡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도, 그걸 핑계로그녀들과 얽히고 싶은 호감도 없었다. - P9
엄마가 영원 이모에게 달려들어 다짜고짜 머리채를 쥐어잡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놀라 모여 있던 사람들이우르르 달려들어 겨우 엄마를 떼어놓았다. 이제 한숨 돌리려나 싶었던 순간, 영원 이모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머리채를 잡혔다. 우리 할머니 쌍분 여사였다. - P55
"여기 오다 미국에서 온 전화 받았어. 작은애가 아파 병원에 간대. 집에서 전화 기다렸다 결과가 어떤지 전해 듣고싶어. 시끄러운 길거리가 아니라." 선배의 진지한 설명에 아차 싶은 마음이 든다. - P76
그랬다. 엄마는 늘 누구에게나 후순위였다. 할아버지에겐 늘 관심 밖이었고, 할머니에겐 마흔 넘어 어렵게 낳은 장남이며 전기기술자 일을 하다 전봇대에서 떨어져 장애를 갖고있는, 나보다 어린 삼촌이 언제나 일 순위였다. 아빠에게는 숙희란 여자가 있었고, 나는 엄마를 너무도 사랑하지만... 제발 나랑은 상관없이 혼자 알아서 행복해주었으면 좋겠으니까. - P82
자신들의 영정사진을 찍으며 지금 이 순간 한껏 살아 있음을 뿜어대는 그녀들의 멋진 웃음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처음으로 엄마의 늙은 친구들에게 호기심이 갔다. 자신들의 영정사진을 재미삼아 찍는 사람들. 저승 바다에 발목을 담그고 살아도 오늘 할 밭일은 해야 한다는 내 할머니. 우리는 모두 시한부다. 정말 영원할 것 같은 이 순간이 끝나는 날이 올까? 아직은 믿기지 않는 일이다. - P130
사실 순영이 울며 석균에게 소리쳤던 그날, 그는 그 사장 ‘아들을 찾아가 흠씬 두들겨 패주었다. ‘싫다는데 왜 만져! 싫다는데 왜 만져!‘ 그러다 직장에서 잘린다고 동료들이 말렸지만 그는 귀한 내 딸을 왜 만지냐고 소리치며 주먹을 휘둘렀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나중에 어느 날 술 취한 석균 아저씨가 나에게 털어놓은 얘기였다. 그때 나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그렇게 직장까지 잘렸으면서, 아버지로서 도리를 다했으면서, 왜 딸에게 미안하다고 말 한마디 못했느냐고. 그리고 그때 그 진실을 왜 말 안 했느냐고.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자신은 그 시대 남자들이 다 그랬듯, 미안하단 말을 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고, 그리고 진실이고 뭐고 무슨 말을할 게 있냐고. 딸을 성추행한 놈보다 자신의 가난이 더 미웠는데. 바보 같은 그가 죽고 나서 나는 순영에게 그 사실을 전했다. 순영이 아버지 영정사진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모습을보면서 나는 알았다. 인생이란 죽어서도 끝나지 않는다는걸, 죽어서도 뜨거운 화해는 가능하다는 걸 말이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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