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통찰력에 의존하여 빠른 학습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리는 지루한 훈련을 거치지 않고도 문제가 되는 지식의 적절한 상징적 표상만 떠올리면 당장 알 수 있다. 쥐, 고양이, 원숭이, 돌고래 같은 비인간적 대상을 연구하기 위한 새로운 실험 환경이나 틀을 고안한 심리학자는 각 동물에게 새로운 과제를 훈련시키는 데에 오랜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 피험자에게는필요한 사항을 말로 전달하면 된다. 짤막한 질문과 답변, 몇 차례의 연습만 거치면 인간 피험자는 새로운 환경에서도 어떤 행위자도 못 따라올 정도의 탁월한 학습 능력을 보인다. 물론 우리는 이런 실험에서 제시되는 표상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른다. 즉 어떻게 ABC 학습이 인간의 학습으로 이행되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자유롭게 떠다니는 전략을 행위자안에 강하게 묶어 두어 그 행위자 자신의 이성이 되게 하려면 행위자는 무언가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성의 표상은 구성되고설계되고 편집되고 수정되고 조작되며 승인받을 수 있다. 한 행위자가 어떻게 그런 놀라운 작업을 수행할 수 있을까? 뇌에서 새로운 기관을 발전시킨 것일까? 아니면 이미 자신이 숙지하고 있던 외부 세계의 조작을 통해 이런 능력을 쌓은 것일까? - P218

행위자는 지각과 행동의 양면에서 자신이 지금 보유한 기술을 가지고 환경에 대처한다. 이런 기술로 극복하기에 환경이 너무복잡할 경우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거나 환경을 단순화시키지 않으면 행위자는 난관에 봉착한다. 대부분의 좋은 자연 표지에 의존하여 길을 찾아 나서지만 일부 좋은 인위적인 표지를 해 두었다가 나중에 이용하는 재주를 고안했다. 예를 들어 개미는 집과 먹이를오가는 길에 페로몬 흔적 (냄새 흔적을 남기며 텃세를 부리는 종들의 개체들은 자기 오줌에 함유된 독특한 향기가 나는 화합물로 영역의 경계를 표시한다. 우리가집 주변에 울타리를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로 무단 침입자를 막기 위해서다. 그것은 또 우리 자신을 위한편리한 인식 수단이기도 하다. 자원을 관리하기 위해, 혹은 경작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투자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구분해주는 경계선을 따로 기억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연속의 중요한 마디들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정보의 일부를 쉽게감지할 수 있는 형태로 외부 세계에 저장함으로써 뇌의 한정된 자원을 다른 활동에 쓸 수 있도록 아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훌륭한 관리 방법이다. 가장 중요한 특성을 식별하는 데 쓸 수 있도록정교한 표지를 환경에 남기는 것은 지각과 기억에 가해지는 과도한 인지 부하를 줄이는 뛰어난 방법이다. 그것은 가장 요긴한 곳에발신 장치를 설치하는 탁월한 진화 전략의 변형이자 개선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 P221

 자주 관찰되는 현상은 아니지만 집을 떠나 병원에서 지내게 된 노인들은육체적으로는 더없이 편한 대우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수가 있다. 심지어 그들은 노망기를 보이기도 한다.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 몸을 씻는 기본적인활동조차 제대로 해 내지 못한다. 그러니 더 큰 흥미를 낳는 활동은 아예 엄두도 못 낸다. 그런데 막상 집으로 돌아가면 혼자서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 나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은 집이라는 환경 안에 너무도 낯익은 표지, 몸에 밴행동을 유발하는 자극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에 음식이 있고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하며 전화기는 어디에 있는지 등을 일깨워 주는 신호를 투여해 온 것이다. 새로운 종류의 학습을 하기에는 뇌의 기능이 둔화되었지만 노인은 그처럼 지겹도록 낯이 익은 세계에서라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런 노인을 집 밖으로내모는 것은 사실상 마음의 주된 영역에서 그를 단절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잠재적 충격파는 뇌수술에 버금갈 것이다. - P226

문학 비평가인 수전 손택 (Susan Sontag)은 사진에 관하여 (Onphotography) (1977)에서 고속 촬영 사진의 등장은 과학 기술을 혁명적으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했다. 이 기술 덕분에 인간은 역사상 처음으로 복잡한 시간 현상을 실시간이 아니라 자기에게 편리한 시간틀에서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인간은복잡한 사건이 낳은 흔적에 대한 정연한 분석을 느긋하게 즐길 수있게 되었다. 3장에서 언급했듯이 자연 상태에서 우리의 마음은오직 특정한 속도로 일어나는 변화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더 빠르거나 더 느리게 진행되는 사건은 아예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진 분야에서 이루어진 기술의 진보는 인지 능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덕분에 우리는 흥미를 품은 사건을 우리의 특정한 감각에 맞게 주문 제작된 맞춤형 틀 안에 재현할 수 있게되었다. - P233

우리가 문화에서 얻는 마음의 도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언어다. 처음에는 입으로 말하는 언어, 그 다음에는 손으로쓰는 언어가 등장했다. 언어는 발신 장치와 표지판이 구조가 단순한 생물의 세계를 원활하게 탐색하게 해 주듯이 인식을 도와 우리의 지능을 끌어올린다. 추상적이며 다층적인 관념 세계로의 항해는 공유하고 비판하고 기록되고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으며 이동과 기억이 가능한 막대한 분량의 표지판이 없다면 애당초 불가능하다. 우리는 말하기와 글쓰기가 수십만 년(혹은 수백만 년)의 격차를 두고 나타났으며 각각의 고유한 힘을 가진 확연히 구별되는혁신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뇌나 마음을 이론화할 때 우리는 이 두 가지 현상을 하나로 묶는 경향이 있다. 인지 작용의 매질로서 사고 언어‘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글은 대부분 우리가 씌어진 사고 언어를 생각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런 경향을 몇 해 전에 나는 "뇌는 쓰고 마음은 읽는 식이라고 꼬집은 바있다. 언어의 등장이 우리의 인지력을 어떻게 확장시켰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씌어진 사고 언어보다는 말해진 사고 언어가 왜, 그리고 어떻게 유익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중점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 P238

발전을 거듭하면서 우리의 딱지는 점점 정교해지고 명료해지고 분절되어서 종국에 가서는 거의 마술에 가까운 경지에 이른다. 표상에 대한 단순한 성찰만으로 그에 관련된 모든 앎을 떠올릴 수있는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대상의 이해자가 된다. 기억 속에 들어 있는 이 인공의 교점, 들리고 말해지던 단어들의 이 어슴푸레한 그림자를 개념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개념은 자신의 수많은 연상물 중에 단어 (공적이건 사적이건)의 청음적, 조음적 특성을 담을 수도 담지 않을 수도 있는 내부 딱지다. 단어는 개념의 원형 또는 조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최초의 개념은 내가 보기에는 ‘발성된 개념이다. 다룰 수 있는 개념만이 검토 대상이 될 수 있다. - P245

이 책은 수많은 질문 공세로 시작되었지만 철학자가 쓴 책인지라 속 시원한 답변이 제시되면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나는 이 질문들이 더 나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이 책을 통해 마음의 다양한 갈래를 지속적으로 탐구할 때 따라가도 좋을 길과 피해야 할함정을 지혜롭게 분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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