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옥선은 소나무로 만들어져 튼튼했다. 판옥선을 만들 때 사용된 나무은 쇠못과 달리 부식의 염려가 없고 외부의 충격에도 쉽게 풀리지 않으며 본체를 단단히 고정시켜주었다. 판옥선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원거리 항해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파도가 센 조선의바다를 수호하는 데 초점을 두고 만들어진 함선이었다. 배가 무겁다보니 판옥선의 격군들은 고생스러웠고 일본의 함선들과속도전을 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튼튼하다‘는 장점이 이 모든단점을 불식시키고도 남았다. 이러한 우수한 내구성 덕택에 판옥선은 갑판 위에 무거운 포대들을 배치하고 장거리 함포들을 발포해도 선체에 큰 무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뛰어난 함포들인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등이 마음껏 발사될 수 있었다. 판옥선이 함포 사격에 금상첨화였던 또 하나의큰 이유는 바닥이 둥근평저선이었다는 것이다. 평저선은 물살을 헤치는능력이 약해 속도를 내기 불리했지만, 함선이 회전할 때 물살에 걸리는부분이 적어 360도 회전이 가능하였다. 함포 사격이 시작되면 함포의 포신은 뜨거워진다. 그 포신이 식는 동안에 조선의 판옥선들은 함포를 좌현에서 쏘고, 정면에서 쓰고, 다시 우현에서 쏠 수 있었다. 튼튼함을 바탕으로 장거리 함포 사격을 정확하게 할수 있고, 제자리 선희가 가능하여 순식간에 적의 함대에 많은 포탄을 쓸수 있는 최적의 전함이 판옥선이었다. - P87
안택선과 세키부네는 모두 삼나무로 만들어져 함선의 전체 무게가 가비웠고, 함선의 바닥이 첨저선으로 뾰족했기에 파도를 헤치는 능력이 뛰어나 속도가 빨랐다. 가볍고 빨랐기에 장거리 항해가 가능하였고 일본의왜구들은 이러한 전함들로 조선과 명나라, 동남아시아까지 항해하는 데거리낌이 없었다. 당시 일본은 ‘칼의 나라‘라는 위용을 떨치고 있었다. 전국시대 100년의 전쟁을 겪은 일본군의 백병전은 어느 국가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해전 역시 상대의 함선에 올라타 백병전을 하는 등선육박전술을기본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해전에서 함포의 역할은 크지 않았다. 더구나 가벼운 삼나무로 만든 함선들은 갑판이 함포의 진동을 이겨내지 못해서함포를 배의 돛 줄에 묶어 여러 명이 잡고 쏘아야 했다. 그 함포 역시 자체제작하지 못했고 포르투갈로부터 수입한 함포였다. 당연히 포의 사정거리도 짧았고 정확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당 쏠 수 있는 포탄의 수 역시 조선에게 압도적으로 밀렸다. - P89
조선 수군이 상성 상 일본 수군을 앞서는 모든 것들은 이순신의 철저한준비의 결과물이었다. 아무리 판옥선이 있었다 한들, 그 판옥선을 자유자재로 움직여줄 격군과 정확한 함포를 쏘기 위해 손발을 맞추며 움직이는포수들, 판에 기여오르는 일본군을 활로 명중시킬 수 있는 우수한 사수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점이 전라좌수영과 다른 수영의 차이였다. 그리고 함포의 정확도를 위한 꾸준한 함포 사격 훈련 많은 연습과 실전에 사용할 포탄의 제작, 그 포탄을 쏘기 위해 필요한 염초 확보와 화약의 제작, 이 모든 것들은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되고 1년 동안 묵묵히 준비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임진왜란 발발 전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아니라 경상좌수사 경상우수사였다면 일본군은 조선땅을 상륙하기도 전에 바다에서 참패하고 일본 열도로 물러났을 것이다. 혹여 일부 부대가 상륙했다치더라도, 전진기지를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고, 육지에 상륙한 일본 육군은 사기 저하와 보급품 부족으로 조선땅에서 빨치산처럼 살아가다 고사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임진왜란(1592~1598)은 우리에게 임진왜변(1592) 정도로기억되었을 것이다.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원균은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 - P92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원균의 수급 베는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거니와 이순신은 적의 수급을 베는 것에 대해 이런 지시를 내렸다. "적의 수급을 베는 데 매진하지 마라. 너희들이 어떻게 싸웠는지는 내가다 보고 있노라." "너희들의 공을 내 직접 장계를 써서 낱낱이 밝힐 테니, 너희는 다만 전투에 이기는 데 집념하라."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수급은 쌀 몇 가마니의 가치가 있었고 논공행상의 기준으로 수급을 얼마나 많이 베었느냐가 적용되었다. 그럼에도 이순신 휘하의 전라좌수영 장졸들은 적의 수급을 베는 데 큰 욕심을 부리지않았다. 이순신의 추상 같은 명령을 장졸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따라주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순신이 조정에 베어 올린 수급보다 원균이 조정에 올려보낸 수급의 숫자가 더 많아지는 촌극이 벌어졌다. 전장의 사태 파악이 안 되는 조정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판옥선의 숫자는 많지만 조심스럽고 소극적으로 전투를 하는 반면, 원균은 고작 3척의 판옥선을 가지고도 용맹스럽게 활약을 한 것으로 생각하는 조정 대신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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