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의 구성적 모순은 우정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볼 때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다. 우정은 선택을 전제하지만, 그 선택의 기준이 지위나 부 같은 물질적 조건이어서는 안 된다. 우정에 대한 많은 격언들은 벗을 선택할 때 오직 그의 영혼만을 고려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우정이 주고받음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이상, 물질적인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일종의 기만을 초래한다. 먼저 우정이 선택적인 관계임을 분명히 하기로하자. 이 점에서 우정은 환대와 다르다. 환대는 시민적 의무이지만, 우정은 의무가 아니다. 환대를 거부하는 것(환대를 표현하지 않는 것 또는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모욕으로 해석되지만, 우정을 거절하는 것은 모욕이 아니다. 환대는 우정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보편적인 환대에 기초해 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잠재적으로 친구임을뜻한다. 하지만 확대가 우정으로 나아가는 데는 차별화의 원리가 작용한다. 우정은 차별성의 인정("너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이다. - P174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다루는 또 하나의 방법은 효도나 돌봄 같은 전통적인 가치를 강조하면서 가족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이다. 조금 전에 생활보호 대상자를 애완동물에 비유했지만, 한국에서는 애완동물이 될 자격조차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폐지를주워 팔면서 혼자 사는 노인이 장성한 자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초생활수급권을 얻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런 사례를 조명할 때 언론은 이 장성한 자녀에게 실제로 부양능력이 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만일 부양 능력이 있는데도 노인을 모시지 않는 거라면, 그 자녀는 ‘인륜을 저버렸다‘는 비난을 받는다. 요컨대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도덕과풍습이라는 것이다. ‘시스템의 한계‘가 논의되는 것은 자녀 역시 막노동을 하거나 몸져 누워 있는 등 극단적인 빈곤 상태에 처해 있을 때뿐이다. 간단히 말해, 한국 사회는 B와 같은 사람들을 일차적으로 A의 위치로 옮겨놓으려 하며,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만 공적부조 시스템을 가동한다. 우리는 ‘가부장제를 보완하는 국가‘라는 말로 이러한 시스템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국가는 사회의 기초가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가족을 부양자와 피부양자, 대표자(호주)와 나머지구성원으로 나눈다. ‘경제‘와 ‘정치‘에 접속되어 있는 사람(돈을 벌어오고 신문을 읽는 사람은 전자, 즉 부양자-대표자이다. 후자 역시 소비자이자 유권자로서 경제와 정치에 연결되어 있지만, 그들의 역할은 제한적이며 수동적인 성격을 띤다. - P184
"우리가 가족에게 애착을 느끼는 것은 아버지, 어머니, 아내, 아이들을 그 사람 자체로서 좋아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이와 달리, 물건에서 비롯되는 유대가 사람에게서 비롯되는 유대보다더 중요하였다. 가족이라는 조직 전체는 무엇보다 재산을 잘 관리하는것을 목표로 삼았고, 사람에 대한 고려는 부차적이었다." 한마디로 가부장제는 이념형으로서의 현대 사회와 원리적으로 대립한다. 현대 사회는 모든 구성원이 사람으로 나타나는 사회이며, 지위나역할 또는 이해관계를 떠나 사람으로서 서로를 대할 수 있는 사회이다. 다른 말로 하면, 현대 사회에서는 모두가 모두에 대해 우정의 가능성을열어둔다. 가부장제는 이 이념형의 대립물을 구성하는데, 우선 집주인= 남자만 온전한 사람의 지위를 누리고 나머지 구성원은 그의 소유물과 비슷한 처지라는 점에서, 그리고 사람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물건에대한 관심이 가족 관계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가부장제에서 여자와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성원권의 불완전함은 우정의 제약으로 이어진다. 우정은 남성적인 미덕이며, 주로 남성 주체의 인격적 성숙이라는 테마와 결부된다. - P186
우정의 조건은 절대적 환대이다. 환대의 조건 또는 한계에 대한 논의들이 암시하는 바와 달리, 절대적 환대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완전히 허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 어떤 벽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 공동체‘에 대한 환상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혁명의 시간이나 축제의 시간에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공동체의 임재를 경험하곤 한다. 하지만 절대 공동체를 시적 형태가 아니라 산문적 형태로 현실 속에 고정시키려는 시도는 번번이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문도 없고, 문지방도 없으며, ‘자기만의 방‘ 따위는 더더구나 없는 그런 공동체에서 우정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는 비밀을 간직할 수도 고백을 할수도 없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일도 함께하는 시간을 기다리는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P197
고래들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이 고대의 코즈모폴리스를 조직하는 원리는 열린 커뮤니케이션 - 누구나 제약 없이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하지만 그것이 열려 있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고래들은 아무 매개 없이 동시성 속에서, 모두가 모두에게 직접 연결되어 있다. 동일한 소리의 장 안에 갇혀 있기에, 그들은 교신 대상을 선택할수 없으며 침묵 속으로 물러날 수도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서로에게 청각적으로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데, 이는 언제나 상대방을 침범할 수 있고, 또 상대방에 의해 침범될 수 있음을 뜻한다. 반면 도서관의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영혼들은 책을 매개로 서로에게 접근한다. 그들을 연결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소통 가능성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지평 전체를 감싸는 소리의 궁륭이 아니라, 도처에서 조용히, 산발적으로일어나는 교류들이다. 이 교류는 거리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것과 혼자 책 속으로 침잠하는 것을 모두 포괄한다. 독서와 대화 사이에는 아무런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독서는 또 다른 대화 - 비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 P200
절대 공동체에 대한 환상은 이처럼 ‘개인이냐 공동체냐‘라는 잘못된양자택일을 강요한다.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이 나와 다른 사람 사이의벽을 없애는 것ㅡ 문자 그대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공동체에 대한 옹호는 사생활 침해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쉽게 전락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과 공동체는 결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며, 공동체 정신을 추구하는 것과 사생활의 자유를 갖는 것 사이에는 본디 아무 모순도 없다. 개인에게 자리/장소를 마련해주고 그의 영토에 울타리를 둘러주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역할인 까닭이다. 뒤르켐이 지적했듯이, 공공성이 강화될수록 사생활의 자유는 오히려 커진다. 가부장제 하에서 기혼 여성과 미성년 자녀는 사생활의 자유를 갖지 못한다. 그들은 집안에서도 마음 편히 쉴 수 없고, 가부장의 눈치를 보면서 일종의 대기 상태에 있어야 한다. 물론 가부장의 성격이 어떠냐에 따라 그들이 느끼는압박의 정도는 달라진다. 하지만 가부장이 언제든지 그들을 야단칠 수있고 심지어 때릴 수 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개인 공간에 대한 침범은 최종적으로 몸에 대한 침법으로 나타난다. 몸은 자아의 마지막 영토이자, 나머지 영토들 - "개개의 인간 존재를 둘러싼 가상의 구"에 대해개인이 행사하는 주권의 원천이다). 그런데 가부장이 이런 권력을 행사할수 있는 것은 국가가 가정을 가부장의 사적 영토로 간주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개입을 자제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부장 사회의 약자들이 겪는 사생활 박탈은 그들이 공공의 힘이 미치지않는 곳에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 P202
그러므로 환대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공공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환대는 공공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아동학대방지법을 만드는일, 거리를 떠도는 청소년들을 위해 쉼터를 마련하는 일, 집 없는 사람에게 주거수당을 주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게 실업수당을 주는 일은모두 환대의 다양한 형식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라는 현대적이상은, 생산력이든 자본주의의 모순이든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떤 자동적인 힘에 의해 앞으로 굴러감에 따라서가 아니라, 이러한 공공의 노력을 통해 실현된다. - P204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는 현대 사회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이다." 우리는 이것을 세 가지 층위에서 확인한다. 첫째, 모든 인간 생명은 출생과 더불어 사람이 된다. 둘째, 공적 공간에서 모든 사람은 의례적으로 평등하다. 셋째,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다(정체성서사의 최종 편집권은 당사자에게 있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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