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낙인으로 취급되는 속성들은 다음과 같다. (1) 신체의 괴물스러움 (2) 정신적인 면에서의 결함(의지박약, 비정상적 열정, 잘못된 신념, 부정직 등), 어떤 사람이 감옥에 있었거나 마약중독이거나 동성애자이거나 극적이거나 실업자이거나 자살을 시도했거나 정신이상일때 우리는 그에게 이런 결함이 있을 거라고 추론한다. (3) 특정한 인종, 민족, 종교에 속해 있다는 사실. 여기서 기인하는 낙인‘종족적 스티그마‘은 가계를 따라 전해지며 가족 구성원 모두를 오염시킨다. 이러한 속성들은 지나치게 눈길을 끌어서 그것을 지닌 사람의 인격의 다른 측면들을 눈에 띄지 않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낙인을 지닌 사람이 언제나 배척당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준다는 이유로, 혹은 신체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는 이유로 격려와감사의 편지를 받는 장애인처럼, 낙인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주목받고사랑받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관심의 대상은 그의 인격 전체가 아니라 인격에서 돌출된 부분, 즉 낙인이다. 현대 사회는 낙인의 존재를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낙인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엄의 관념은 낙인을 초래하는 불명예스러운 속성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을 높이거나 낮추는차이들이 모두 사소하고 우연적이며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내포한다. 이에 따라 낙인자the stigmatized와 정상인the normals의 만남은 어떤종류의 기만을 수반하곤 한다. 정상인은 낙인을 포용하는 듯한 몸짓을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낙인자가 자신과 동등한 인간임을 믿지 않는다. 미디어에 종종 나오는, 낙인자를 대상으로 한 사회통합 의례 - 고아들에게 키스하는 연예인, 장애인을 목욕시키는 정치인 등등-가 이를 잘 보여준다. ‘사회‘를 대표하여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는 이 정상인들은 자기 앞에 있는 낙인자들을 아무나 덥석 껴안음으로써 자기가 그들에 대해 아무런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과시하려한다. 하지만 정상인들이 이렇게 낙인자들의 몸을 함부로 만질 수 있는대상으로 취급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관계의 불평등성을 드러내는것이다. - P122
말하자면 고프먼은 의례의 교환에 참여할 자격이라는 측면에서 다음 세 가지 경우를 제시하는 셈이다. 의례의 교환에 동등한 자격으로참여하면서 상대방에게 존중의 의례를 기대하고 요구할 수 있는 경우, 특정한 행동 노선을 따를 때만 조건부로 의례 교환에 참여할 수 있는경우, 의례 교환의 장에서 배제되어 ‘탈인격화‘의 과정을 겪는 경우, 여기서 뒤의 두 경우에 속하는 사람들은 성원권이 불완전하다고 할 수있다. - P127
모욕을 의례적 코드의 위반으로 정의할 때 생겨나는 역설은 의례적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 즉 행위자들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의례적 권리/의무가 달라지는 사회에서는 의례적 지위가 낮은 사람(실제로 모욕적인 대접을 받을 가능성이 큰 사람일수록 이론적으로는 더 적은 모욕을경험한다는 점이다. 왕이나 영주처럼 고귀한 신분에게는 작은 결례도큰 모욕이 될 수 있다. 모욕은 그것이 손상시키는 것, 즉 명예의 중대함에 비례하여 중대해지기 때문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일수록 그에게 저질러질 수 있는 무례함의 한도가 커진다. 노예처럼 아무런 명예를 갖지않은 자에게는 어떤 행동을 해도 모욕이 되지 않는다. - P127
결투는 모욕에 대한 제도화된반응이라고 할 수 있는데, 행위자들은 이를 통해 자신이 명예를 가진 인간임을 주장한다. 모욕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예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다는 뜻이므로, 결투 사회의 구성원들은 모욕을 당했을 때자기가 실제로 느끼는 모욕감과 별개로 결투를 신청해야 한다는 압력을 느낀다. 결투는 신분적 특권이지만, 이런 의미에서 의무이기도 하다. 모욕을 씻을 기회가 남아 있는 한, 모욕당했다는 사실 자체는 아직 불명예가 아니다. 모욕당한 자가 신분에 어울리는 명예 의식을 보여주못했을 때 모욕은 비로소 진정한 불명예로 변한다. 그는 그가 속한 집단 - 귀족, 신사, 또는 남성에 속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들으며, 자격이 없는데도 그 집단에 계속 남아 있음으로써 그 집단을 부끄럽게 하는 사람이 된다. - P128
우리는 순수한 폭력, 아무런 상징성도 띠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폭력과 의례로서의 폭력을 구별해야 한다. 체벌은 폭력인 동시에 일종의 의례이다. 체벌이 체벌당하는 사람의 협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 다른 모든 의례와 마찬가지로, 체벌은 맞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을 포함한 행위자 모두가 행위의 의미와 절차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고, 그것이 이루어져야 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무언의 협력을 할 때만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 P129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모욕하는 자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개새끼야. ‘나는 개새끼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복창해. 이제 개처럼 엎드려서 내 발을 핥아). 하지만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이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 P131
신분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근대화(또는 현대화modernization)를 바라보는 관점 역시 바꾸어놓는다. 우리는 근대화를 하나의 위치 체계에서또 다른 위치 체계 수직적인 구조에서 수평적인 구조 또는 개인들의 위치가 고정된 체계에서 이동성이 높은 체계로의 전환이나, 부와 특권을 분배하는 특정한 원리에서 또 다른 원리로의 이행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인력거꾼 김첨지 같은 이들이 ‘똑같은 사람‘으로 여겨지기 시작하고, 사람대접을 받게 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니면 근대화란 신분적인 정체성 외에 다른 정체성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들 모두를 감싸고 있는 ‘사회‘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사회의 발견‘은 근대화의 핵심적인 사건이다. - P142
사회가 19세기에 비로소 발견(또는 발명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논자들은 이 개념의 확산을 빈곤의 문제에 대한 국가적 개입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사회주의적인정책들은 빈민에 대한 시혜이거나(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혁명론』 빈곤이 가져오는사회적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시도(자크 동즐로, 『사회보장의 발명 정도로 그 의의가 축소된다. 이 점에서 아렌트의 우파적인 비판과 동글로의 좌파적인 비판은 기묘하게도 수렴된다. 흥미로운 점은 아렌트는 사회가 발견되는 시점을 로베스피에르의 집권기로 잡고 있는 데비해 동즐로는 프랑스혁명의 정신이 변질되는 1848년으로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사회의 발견은 그 전까지 사회 성원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신분 질서가 와해되면서 공적 공간으로 들어가게 된 것과 관련이 있으며, 사회정책의 실시에는 이들이 사회 성원으로서 어엿한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을 마련해준다는 의미가 있다. 아렌트의 견해와 달리 사회적 권리의 인정은 ‘정의의 정치‘에서 ‘동정의 정치‘로의 이행을 나타내는 지표가 아니라, 정의의 정치를 인민 전체에게 확대하기 위한 조건인 것이다. - P146
또한 나는 신분의 폐지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필연적인 것도 아니고(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에서 결정적인 것도 아님을 상기시키려 한다. 한국 사회가 신분제로 회귀하고 있다는 증거는 많다. 단지 소득수준이나교육수준이 아니라 주거지, 학교, 소비시장, 심지어 언어 (이중언어 사용과 단일언어 사용)에서 계층적인 분리가 뚜렷해지고 있고, 법은 그것을 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촉진하는 중이다. 즉, 한두 개의 기준이 아니라 모든 기준에서 구별되는 특수한 계층들이 생겨나 사회 안에 별개의사회를 형성하고 있는데, 신분이란 이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반동‘이라고 일컫는 것은 지나친 낙관주의일 것이다(반동‘이란 거꾸로간다는 뜻이며, 역사가 결국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리라는 기대를 드러낸다). 긴 안목에서 본다면 신분의 폐지는 인류의 역사상 매우 이례적이며 삽화적인 사건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 P166
마지막으로 나는 신분주의와 학교 폭력의 연관성에 대해 언급하고싶다. 우리 사회의 신분주의가 위험 수위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가장 날카로운 경고음은 교실에서 나온다. ‘일진‘이 더 이상 가난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아니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교실 내의 위계는 사회의 위계를 닮았다. 가진 게 많은 아이들, 지배 문화의 요구에 가장 잘부응하는 아이들이 꼭대기에 있고, ‘자본‘이 가장 부족한 아이들이 밑바닥에 있다. 위에 있는 아이들은 아래 있는 아이들을 괴롭힌다. 별다른 이유 없이, ‘장난삼아 그래도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관계를지배하는 감정은 경멸이다. 학교는 겉으로는 존중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경멸을 가르친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모욕하고, 가난한 아이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힘센 어른은 힘없는 아이들을 막 대해도 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면서 말이다. 그래서 겉치레로 하는 말과 진짜 메시지를 구별할 만큼 영리해진 아이들은 자기보다 못한 아이를 경멸함으로써 학교의 가르침을 실천한다. 마치 어른들이 입 밖에 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회의 진실을 아이들이 연극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교실이라는 무대 위에서 날마다 상연되는 잔혹극. 그러니 이 연극에서 몇명쯤 죽어나가더라도 너무 호들갑 떨지 말기로 하자. 지금 아이들은 사회에 나갔을 때 꼭 필요한 두 가지 기술-경멸하는 법과 경멸에 대처하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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