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 수 없는 삭막한 분위기 같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귓속엔 권총과 수류탄을 찬채 밤중 몰래 숨어들어온 사람의 그 굵은 음성이 아직 쟁쟁했다. 바로 그가 몇 달 전에 집을 나간 후 소식을 몰라 식구 모두가 애타하던 삼촌임에 틀림없다면, 유감이지만 삼촌의 목소리는 내가 첫귀에거의 못 알아들을 만큼 무섭게 변모해 있었다. 자갈바탕에 함부로굴린 질항아리처럼 그렇게 거칠 수가 없고, 어떤 일에도 신명이 안난다는 투의 그런 무심한 음색이었다. 내가 기억하는바 우리 삼촌은 아무 자리에나 끼어 버릇없이 너털웃음을 잘 웃고 자기와는 전혀 이해 상관이 없는 남의 일에도 곧잘 뛰어들어 판세를 될수록 시끌짝하게 유도하면서 까닭 없이 흥분하고 쉽게 감동해 버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금 전의 그 소리는 어김없는삼촌의 음성이었다. 소리의 변모만큼이나 험상궂어 있을 삼촌의 얼굴 모양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 별안간 오금이 가려워오기 시작했다. 이 가려움증은 삽시에 전신으로 번져 꼭 개미집이 많은 풀밭에 누웠거나 한 듯이 등 복판이나 겨드랑 밑 아니면 발가락 사이 같은, 하필 누운 채로 어른들에게 들키지 않고 손을 뻗어 용이하게 긁을 수 없는 부위들만 심하게 물것을 타는 것처럼 스물거리는 것이었다. - P33
사람들이 이내 좌우로 갈라지면서 가운데로 길이 뚫렸다. 낯선 사내가 앞장서 걸어나오고 바로 뒤를 이어 아버지가 따라나왔다. 그리고 한 걸음 떨어져 맥고자의 사내가보였다. 그는 아버지의 팔을 뒤로 결박한 오라의 한쪽을 손에 감아쥐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그는 헤벌쭉 웃으며 한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내 앞에서 아버지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아버지는 몹시 안타까워하는 눈초리로 나를 내려다보며 한참이나 무슨 말을 할 듯 할듯하다가는 잠자코 도로 발을 떼기 시작했다. 대문간에서는 어머니와 고모 그리고 할머니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자빠지고 고부라져가며 통곡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내게도 어떤 고통의감정이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맥고자한테 나를 일러준 그 이북아이를 찾아 동네 안팎을 무작정 뒤지고 다니는 동안, 그것은 일종의 배신감과 어울려갈수록 무서운 분노로변했고, 때로는 감당 못할 큰 슬픔이 되어 눈을 후비고 가슴을 찌르기도 했다. 맥고자의 그 사내는 나한테 그런 얘길 들었다는 걸 누구한테도 알리지 않겠다고 단단히 약속한 바 있었다. 그것은 그때 나이의 내겐 어른들에 의해서 기록된 최초의 치명적인 배신이었다.
11 - P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