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배가 소리의 속도로 나는 비행기의 엔진을 만드는 루카스 항공(Lucas Aerospace)에서 일했던 공학자 마이크 쿨리 (Mike Cooley)의 고민을 소개했다.
"우리는 소리의 속도로 나는 콩코드 비행기를 설계하고 생산할 수 있두고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가난한 노인이 얼어 죽는 일을 막는 난방 기술을 공급할 수 없습니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 인간은 힘든 노동에서 해방되어 창조적인 일에 몰두하리라는 전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과학 기술이 가장 발전한 산업 국가의 수많은 노동자는실업자 신세가 되고 있습니다."
쿨리가 1970년대에 고민했던 이런 과학 기술의 역설은 극복되기는커녕 수십 년이 지난 21세기에 오히려 심화되었다. 예를 들어, 대형 마트 노동자는 매일 10~25 킬로그램의 무거운 상자를 수백 차례씩 들고 나른다. 그들은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외쳤다.
"제발 상자에 ‘손잡이 구멍‘이라도 뚫어 달라."
로봇, 인공지능(AI), 빅 데이터, 생명 공학 등이 추동하는 ‘혁명‘을 예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아마존이나 테슬라 같은 기업의 창업자가 달(제프 베저스)이나 화성(일론 머스크)으로의 ‘인류 이주를 공공연하게 말하는 상황에서 무거운 상자의 손잡이 구멍이라도뚫어 달라."는 절박한 요구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역설인가. - P12

이 책에서 나는 결코 ‘돈‘, ‘경제‘, ‘성장‘과 동일시할 수 없는과학 기술의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당장 과학 기술은 문학, 그림, 음악 등 훌륭한 예술 작품이 그렇듯이 인간의 가장 빛나는 창의력의 산물이다. 더구나 그렇게 세상에 등장한 어떤 과학 기술은우리 삶의 모습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과학기술은 그 자체로 ‘문화‘다.
이뿐만이 아니다. 기계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성난 노동자의 19세기 러다이트 운동부터 새로운 차량 호출 서비스를 둘러싼 21세기 택시기사의 반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과학기술은 국가, 자본, 노동이 힘겨루기를 하는 정치의 장이다. 때로는 피비린내 나는 격렬한 갈등으로도 이어지는 이 정치의 결과에 따라서 과학기술은 해방과 억압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 P14

당시 한재각-김병수-강양구 트리오를 꿰뚫는 문제 의식은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서 공히 나타나는 ‘윤리의 부재‘였다. 핵심은 난자였다. 인간 복제 배아를 만들려면 여성의 난자가 필요하다. 그간황 박사는 2004년과 2005년 《사이언스》에 발표한줄기 세포를 얻고자총 427개(2004년 242개, 2005년 185개)의 난자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런 난자 숫자도 놀랄 만큼 많은 것이었다. 전 세계 어떤 과학자도 그렇게 많은 수의 여성의 난자를 확보해 실험에 이용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난자의 출처에 과학계의 이목이 집중된 터였다. 더 나아가 한재각-김병수-강양구 트리오는 이 발표의 신뢰성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한 마리의 복제 동물(동물복제 배아)을 만드는 데도 수백 개에서 수천 개의 동물 난자가 필요한데, 그보다 훨씬 더 어렵다 여겨진 인간복제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뽑아내는 데 고작(?) 수백 개의 난자만 사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중에 검찰 수사 결과, 황우석 박사가 확인가능한 난자만 총 2,221개를 사용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 P30

이런 한재각 연구원의 압박에 꿈쩍 않을 것 같던 황우석 박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2005년 10월 7일 <조선일보》는 ‘황우석 교수 ‘민노당 때문에 연구 못 할 지경‘이라는 눈에 띄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황 박사가 10월 5일 당시 황창규 삼성전자 사장의 상가를 방문한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털어놓은 민주노동당을 겨냥한 불만을그대로 전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이 국정감사에 필요하다며 별별 자료를 다 요구하고 있다."
"연구 팀이 자료 작성에 시간을 빼앗기다 보니 연구에 엄청난지장을 받고 있다."
"(심지어 중국 연변 처녀들의 난자를 불법적으로 거래했다는 소문이 있다며 민주노동당이 자료 제출을 요구해 왔다."
"줄기 세포 연구에 필요한 모든 난자는 생명윤리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구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연변 처녀 난자‘ 괴담으로 상징되는 황우석 박사의 이런 발언에는 불안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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