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것인 모양이다. 며칠 전만 해도 일본기 히노마루 붉은 원의반쪽에다 검은 먹칠 바르고 네 귀엔 짝을 그려넣어 만든 헐어빠진 기를 달고 나오더니 어느새 새걸로 개비했나? 진작 그럴 거지. 섬사람들이 뒷전에서 얼마나 쑤군쑤군 욕을 했는데. "물건 아낄 게 따로 있지, 발쎄 갈기갈기 찢어발기든가 불태워 없애부려야 마땅헌 일본기를 가지고 대한민국 기를 맹글다니, 저것들은 밸도 소가지도 없는가?" "아이고, 쟈이들이 어떤 것들이라고 속창지를 차릴것고, 일본놈 치질 똥고망 핥으며 해먹던 것들인다. 같은 섬 동포갑죽 벗기기를 흉년에 송깃대 벗기듯 하던 것들이 새 나라 경관 노릇을 하고 있으니 오죽헐 거여? 일본기로 태극기를 맹그는 거나 일본 순사 출신을 대한 민국 경찰로 맹그는 거나 매한가지가 아니냔 말이여!" - P99

 그러나 올봄에 저희 상급생인 중학 4, 5학년 중에 몇십명이 집단으로 입산하여 산폭도가 된 불상사가 생긴 다음부터는 중학생이라면 모두 한데 싸잡아 의심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개중에는 벌써 코밑이 뜬숯검댕 묻은 것처럼 거뭇거뭇한 숙성한 놈들도 이따금 눈에 띄는데 그런 아이를 보면 귀리집은 걱정스러워진다. 저러다가 걸리면 어쩌려고••• 카미소리 면도칼로 슬쩍 밀어버리라고 귀띔해주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 난리 통에 카미소리는 또 어디 가서구하나 저번날 푸지게로 돌을 져 나르던 한 아이가 바람에 모자를휘딱 날렸는데, 귀리집이 그 모자를 집어서 돌을 진 채 엉거주춤서 있는 그 아이 머리에 얹어준 일이 있었다. 그때 무심코 모자 속을 들여다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모자 안감에다 헝겊을 대어 몰래 담배쌈지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저러다가 담배 피운다고 어른 취급 받으면 어찌하려고••• 나이가 원수인 세상에 어른 되려고 하다니. 이 난세엔 아이는 자라서는 안된다. 나이 먹어서도 안되어 젊은 나이가 죄요 원수인지라 반드시 총 맞거나 죽창 맞아 죽는 날이 오는 법이다. - P105

순원이 아방은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죽더라도 까마귀 모르게 죽었으면 아무 날 아무 시에 죽었다는 기별이 제발 오지 말았으면 그러면 어디엔가 살아 있겠거니 하는 미련이 남게 되고 이 실낱같은 미련에 매달려 사노라면 차츰차츰 체념을 배워 제풀에 포기하게 되리라. 귀리집은 아마 죽었다는 기별을 받은 그당장에 자기가 실성하고 말 거라고 생각한다. 귀리집은 남편 생각가슴팍이 맷돌짝으로 짓눌린 것처럼 저릿저릿하고 답답하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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