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복리 단체가 가장 중요한 형태의 잔혹한 처우에 반대하여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 중 한 가지 이유는 역사적인 것이다. 창립 당시 ‘왕립동물학대방지협회‘와 ‘미국 동물학대방지협회‘는 과격한 집단들로, 그 당시의 일반인들의 생각을 훨씬 앞질러갔다. 현재와 같이 당시에도 그들은 수많은 극악한 학대의 희생양이었던 가축에 대한 학대를 포함해 모든 형태의 동물 학대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단체들은 재력을 갖고, 회원수가 증가하고,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서서히 자신들의 급진적인 정신을 상실하였으며, ‘체제(establishment)‘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관료, 사업가, 과학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그들과의 접촉을 통해 동물의 조건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방법을 통해 약간의 개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동물을 식용이나 연구용으로 사용하는 데 근본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과 접촉함으로써 창립자들을 고무했던 동물 착취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의 칼은 무뎌지게 되었다. 협회는 사소한 개혁을 위해 근본 원칙을 수없이 양보하였다. 그들은 조그마한 개선이 아예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에 비해 낫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변화는 동물들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오히려 그 이상의 개선이 필요하지않다고 대중들을 안심시키는 역효과가 나타났다. - P369
하지만 당신은 가축의 고기를 먹는다. 여기에서 당신이 누군가에게 당신을 위해 동물을 죽여 달라고 값을 치른 것 외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또한 모피가공업자는 다음과 같이 대응할 것이다. "당신은 가죽옷을 입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데에 반대한다. 하지만 당신은 가죽 신발을 신고 있지 않은가?" 이밖에 동물 실험을 하는 사람들은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이 허용된다면 지식을 증진시키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아주 그럴 듯하게 반문할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고통을 주는 것만을 문제 삼아 실험에 반대한다면, 식용으로 쓰이기 위해 살해된 동물들 또한 고통 없이 살지 않았다는 지적이 이루어질 수 있다. 심지어 투우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마저도 "도축장에서의 수송아지의 죽음은 이를 먹는 사람에게 만족을 주는 데 그치지만, 투우장에서의 황소의 죽음은 수천 명의 관객들에게 쾌락을 준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에는 황소가 수송아지에 비해 훨씬 강한 고통으로 괴로워할 것이지만, 평생을 살아가면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더 나은 대접을 받는 것은 황소다. 그런데 일관되지 못하다는 비난이 동물에 대한 잔혹한 실천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논리적으로 정당화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브리지드 브로피 Brigid Brophy 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설령 사람들의 팔을 부러뜨리는습관이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이라고 해도,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이 잔인하다는 것은 여전히 참이다. - P389
나는 이 책의 제1장에서 인간 아닌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세 가지 뚜렷한 기준, 즉 행동, 신경계의 특징, 고통의 진화적유용성을 제시한 바 있다. 이 세 가지 기준 중에서 식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되는 것은 없다. 우선 지금까지 식물들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시사하는 관찰 가능한 행동은 없었으며, 이는 과학적으로 신뢰할 만한 실험을 통해 확인된 적이 없다. 다음으로식물에게서 중추 신경계를 닮은 것을 살펴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고통을 야기한 대상을 피해 달아날 수 없는, 혹은 고통 지각 능력을 이용하여 죽음을 피하지 못하는 종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진화시켰다고 상상하기란 어렵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식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생각은 근거가 미약한 것처럼 보인다. 식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주장의 사실적 근거에 관한 논의는 이만 줄이기로 한다. 이제 그 논리적 근거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연구자들이 식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음을 시사하는 증거를 발견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그러한 증거가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지금까지 먹어 온 것을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고통과 굶주림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면, 이때 우리는 상대적으로 적은 악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 P397
그럼에도 동물 해방 운동은 다른 어떤 해방 운동보다도 인간 편의 훨씬 큰 이타적 태도를 요구한다. 동물들은 스스로가 해방을 요구할능력이 없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조건에 항의하는 투표, 시위, 또는 거부 운동을 벌일 수도 없다. 인간에게는 이 행성이 더 이상 생명체들이 살아갈 수 없는 장소가 될 때까지, 혹은 영원히 계속해서 다른 종들을 억압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냉소적인 시인과 철학자들이 항상 말해 온 바와 같이 도덕성이 자기 이익과 부딪칠 경우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면서 우리의 횡포가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우리가 누리는 지위가 도덕적으로 옹호될 수 없음을 인정하여(반역이나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배하에 있는 생물 종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를 종식시킴으로써 진정한 이타성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을 입증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 모두가 개별적으로 이에 대해 어떻게 답하는가에 달려 있다.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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