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를 당하여 사또가 기껏 한다는 일은 향청의 유생에게 의뢰하여 먹을 수 있는 구황식물 수십종을 방을 붙여 알리는 일과, 술과 떡 빚는 행위를 엄금하는 것뿐이었다. 그건 실로 어처구니없는일이었다. 어디 먹는 풀 이름을 몰라서 사람들이 매양 굶기를 밥먹듯 하고 있단 말인가. 소루쟁이, 냉이, 고들빼기, 조릿대, 원추리,
고사리, 둥굴레…… 어디 이름 몰라서 못 캐 먹는가, 게을러서 굶는가. 숭덕산 밑에 사는 사람들이 말랑말랑한 진흙으로 흙떡을 빚어 먹는다는데, 그 사람들은 산나물 들나물 죽이 좋은 줄 몰라 토식(土食)하고 있단 말인가 때가 일러 싹도 안 난 것들을 어떻게 캐먹는가.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술과 떡을 빚지 말라니, 도대체 누구보고 하는 말인가. 숭덕산 밑의 저 흙떡 해 먹는 사람들 두고 떡 먹지 말란 말인가. 술쌀, 떡쌀은커녕 쌀독은 바닥난 지 오래고 솥에는쇳녹이 뻘겋게 앉아 있었다.  - P23

어째서 큰 부정은 죄가 안되고 작은 것만 죄가 되나 부정이란 그 규모가크면 클수록 부정의 탈에서 벗어나는가? 그렇다. 도둑도 좀도둑이 훨씬 도둑답다. 그것이 대담해져서 명화적쯤 되면 이미 도둑의 탈은 벗겨지는 법, 부정이란 것도 좀스럽고 쩨쩨한 구석이 있어야 진짜 부정이지, 쥐가슴 태우며 훔쳐내는 쌀 한톨, 실 한가닥은 부정이지만 환곡미 이백석 횡령은 이미 부정이 아니었다. 그건 백성들의 상상을 훨씬 능가해버린 것,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추상이었다. 그건 이미 부정이 아니라 지체 높은 권세였다. 큰 부정일수록 이렇게 모두 환골하고 탈태하여 나라 경영의 대종을 이루었던 것이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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