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훑어보기라는 개념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 번째경우는 선형(線形)의 훑어보기다. 이 경우 독자는 텍스트의 첫머리에서시작하여 여러 줄 혹은 여러 페이지를 건너뛰며 끝을 향해 나아가는데, 물론 끝에 이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두 번째 경우는 순환형의 훑어보기로서, 독자는 페이지 순에 따라 독서를 하는 게 아니라 작품속을 산책하듯 책을 읽는데, 때로는 맨 끝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이방식이 첫 번째 방식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이것도 우리가 책과 맺는 흔한 관계 양식의 하나이며, 그렇게 읽은독자라고 해서 그의 견해를 속단해서는 안 된다.
한데 책을 이런 식으로 파악하는 일은 독서와 비독서의 차이, 혹은 독서에 대한 관념 자체를 상당히 뒤흔들어버린다. 어떤 책에 대해 일정 시간을 보낸 사람들, 말하자면 그 책을 완전히 읽지는 않고 몇 시간정도 뒤적거린 사람을 어떤 범주에 넣어야 하는가? 그들이 자신이 접한 책에 대해 말할 때, 과연 우리는 그들이 책을 읽지도 않고 말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무질의 사서처럼 책 주변에만 머무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책을 깊이 탐독하되 그 책의 위치를 정하지 못하는 사람과, 어떤 책 속으로도들어가지 않으면서 모든 책 속을 돌아다니는 사람 중 과연 어느 쪽이더 나은 독자인지 자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앞으로는 점점 더 그렇게 되겠지만, 무엇이 비독서이고 무엇이 독서인지를 명확히 규정하기란 어렵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하나의 주어진 문화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책들의 경우, 참으로 그것들을 읽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독서와 비독서의 중간 영역에위치하고 있는 것 같다. - P55

한데 발레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각각의 책 앞에서도 동일한 태도를 채택하여, 그 책에 대한 전체적 시각-이는 책들 전체에 대한시각과 연관되어 있다을 갖도록 부추긴다. 이러한 관점의 추구는 책의어떤 대목에 빠져 길을 잃지 않고 책과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만 가능하며, 그래야만 책의 참된 의미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P57

 이는 곧 그 책이 아무리 독창적이고 스캔들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고립된 오브제가 아니라 다른 모든 책과 마찬가지로 앞에서 내가 언급한 그 집단도서관 전체에 참여하며 그 속에 통합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호르헤가살인을 결심하는 이유도 바로 그 책이 이 집단도서관에 참여하여 도서관의 기반 자체를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그 책은 수도원의 도서관을 위협한다. 왜냐하면 그 책은 점점 더 많은수도사들을 소위 문화로 일컬어지는 발견과 타락의 장(場) 쪽으로 이끌고 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호르헤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제2권이 그런 실재하는 도서관만이 아니라 인간들의도서관 전체를 위험에 빠트린다고 본다. 성경을 비롯하여 이 도서관의다른 모든 책들에 대한 독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책 때문에 수정될거라는 것, 즉 책들의 무한 연쇄 속에 연결되어 있는 다른 모든 책들의위치를 이동시켜버릴 수 있는 힘이 그 한 권의 책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 P70

그런 담론들 중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과 나누는 담론 역시 가벼이볼 수 없는 지위를 갖는다. 책에 대한 우리 자신의 담론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고 그들의 말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독서를 시작하는 즉시, 아니, 그 이전부터 이미 우리는 책들에대해 우리에게 말을 하기 시작하며 먼저 우리의 마음속으로, 뒤이어 다른사람들과 함께, 그런 연후에는 영원히 가정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진짜 책은 저 멀리 치워버리고서 바로 그 담론들과 견해들만 상대하게되는 것이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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