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
헨리 키터리지는 오랫동안 이웃 마을에서 약사로 일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여름날 약국으로 이어지는 큰길로 들어서기전 마지막 구간의 가시덤불에서 야생 라즈베리가 송알송알알이맺힐 때나,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짐없이 약국으로 차를 몰았다.
은퇴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일찍 일어나 예전에 그런 아침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떠올렸다. 마치 세상이 혼자만의 비밀인 듯이. - P9
아직 사춘기의 신체적 특징이 나타나진 않았지만 아들이 별안간 눈에 띄게 퉁명스러워진 참이어서 아들의 기분이 독기운처럼 공기 중에 퍼지고, 올리브도 크리스토퍼만큼이나 변하고 또 변덕스러워 보이던 때였다. 모자는 순식간에 격렬히 싸우다가도 그 분노는 이내 무언의 친밀감처럼 둘을 감싸버려 영문을 알 길 없는 헨리만 멍하니 따돌림을 받는 기분이 되었다. - P13
그러나 헨리는 온건파가 우세하다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언젠가 남편과 진정한 가정을 꾸리는 것만을 꿈꾸는 여자와 매일 약국에서 일했다. "저는 여성 해방 따윈 관심없어요." 데니즈가 헨리에게 말했다. "저는 집을 갖고, 침대를 정돈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렇지만 헨리 키터리지에게 딸이 있다면 (그는 딸이 있으면 정말 좋겠다고생각했다) 그는 이런 생각에 대해 주의를 주었을 것이다.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좋아, 침대를 정돈하렴. 하지만 머리를 쓸 방법을 찾아야지. 하지만 데니즈는 그의 딸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가사를 돌보는 것도 고귀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그는 피붙이가 아닌 사람을 보살필 때 느끼는 자유로움이 어떤것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 P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