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만남은 여기서 마쳐야 하겠어요. 동구는 너무 늦기 전에집에 가야 하고, 실은 제가 오늘 밤에 광주에 내려가야 하거든요.
할머니 생신이라서요. 원래는 밤차를 타고 내일 아침에 닿을까 했는데 지금 시간이 별로 늦지 않았으니까 서두르면 늦은 밤에라도할머니 댁에 가서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내일 저녁에 바로 올라오십니까?"
"아니오. 19일이 할머니 생신이라서 그날 아침에 미역국이라도같이 먹고 올 생각이에요. 학교에는 월요일에 휴가를 내겠다고 말씀드려 놓았어요. 할머니 생신 때문에 휴가를 낸다니 참 유난하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키워주셨기 때문에 제겐 아주 각별한 분이세요. 제가 휴가를 내기 어렵다고하면 할머니가 교장 선생님께 전화라도 하실 게 분명해요. 우리 할머니는 그런 분이죠. 오늘도 토요일인데 왜 일찍 내려오지 않느냐고 학교로 네 번이나 전화하셨어요."
"손녀 사랑이 지극하시군요. 그럼 서울에 올라오신 후에 다시 한번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모처럼 만난 자리였는데 참 아쉽네요." - P251

"너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만······ 박영은 선생님은 돌아가신 것 같다. 믿을 만한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다. 그러니까 선생님을 더 이상 기다리지 말아라."
머리 위를 덮고 있는 숲에서 저녁 해가 아까워 온통 귀를 찢어발길 듯이 울고 있던 매미들이 한순간 잠잠해졌다. 귓속의 압력이 갑자기 심해져서 고막이 터질 것 같았고 머리가 아팠다.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오면서 숨이 막혀 나는 입만 뻐끔거렸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삼촌은 계속 고개를 내젓고 눈을 끔벅거리고 손을 무릎에 두었다 발바닥을 만졌다 얼굴을 쓰다듬었다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는데 가만보니까 손이 얼굴로 갈 때에는 황급히 눈가의 물기를 닦아내는 것 같았다. 어리석은 곰처럼 못난 그 모습을바라보고 있으려니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서 나는 바위에서 뛰어내리고는 고함을 질렀다.
"세상에 그런 헛소리가 어디 있어? 박 선생님이 죽긴 왜 죽어?
그런 거짓말이나 하려고 나를 불렀어? 삼촌은 정말 바보야! 세상에서 제일 바보천치 똥개야!!!" - P278

서늘한 손가락이 내 목덜미에서 등골까지 서두름 없이 훑어내려갔다. 장독대로 올라가는 시멘트 계단 모서리에 무언가 어두운 얼룩이 묻어 있었다. 영주의 귓속에서 색깔 어두운 애벌레가 느릿느릿 기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애벌레는 생전 처음으로 맡는 밤공기내음이 마음에 드는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귓바퀴의 물렁뼈 위에서 몸을 부풀리며 휴식을 취했다. 내가 바지를 쥐어뜯으며 바라만 보는 동안, 영주는 마지막으로 느릿하게 눈을 한 번 깜박이더니 여전히 하늘의 별들만 골똘히 쳐다보면서 여리게 떨던 손가락의 움직임도 멈추어버렸다. 영주의 귀에서 길고 끈적한 몸을 드러내면서 귓바퀴 계단을 한 칸 한칸 내려온 어두운 애벌레는, 할머니가 일구어놓은 향기로운 검은 흙을 만나자 탐욕스럽게 고개를 처박았다. - P294

나는 창문 너머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장님의 부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나섰다. 대문이 닫히면서, 아름다운 정원의 정경이 차츰 좁아지더니 마침내 가느다란 광채의 선이 되었다가, 갑자기 시야에는 녹슨 철문의 모습만 들어왔다.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은 이제 기억 속에 하나의 영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차가운 철문을 힘주어 당기며 나는 아름다운 정원에 작별을 고했다. 안녕, 아름다운 정원. 안녕, 황금빛 곤줄박이.
아름다운 정원에 이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겠지만, 나는 섭섭해하지 않으려 한다.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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