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불완전한 2류 신들을 숭배할 수 있죠? 나는 애당초 하느님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옛날부터 생각했다. 우리보다 더 나은 존재로서 우리가 닮고 싶어 하는 모델을 제공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런 이유가 없다면, 작은 냉장고만큼 배가나오고 곧잘 엉덩이를 긁어대는 저 아랫집 남자를 숭배해도 달라질것이 없을 것이다.
제이미는 이 점에 대해서도 답을 내놓는다. "우리는 불완전하기때문에 완전하고, 그건 신들도 마찬가지예요. 예를 들어, 제우스는아동성애와 간통을 저질렀고, 폭군이었죠. 하지만 우리가 제우스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어요." 이교의 신들은 완벽한 존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교훈으로서 존재한다. 너희는 우리처럼 일을 엉망으로 만들지 말지어다. - P371

그런데 샤먼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샤먼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평소에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사실 잘 모르는 단어
‘중 하나다. ‘샤먼‘은 시베리아어로 ‘흥분한 사람, 마음이 움직인 사람‘을 뜻하는 사만(sanman)에서 유래했다. 마음에 든다. 샤먼은 동적이다. 샤먼은 인정을 베푼다. 그들은 환자가 어찌 되든 관심도 없는 차갑고 냉담한 치유사가 아니다. 샤먼은 환자에게 인정을 베풀 뿐만아니라 그들 자신이 바로 환자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 치유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치유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돈을 돌려준다. 환자가 죽으면 샤먼이 받은 돈을 돌려주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우리 보건의료 시스템도 이런 환불 보장 제도를 도입하면 크게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샤먼의 또 다른 정의는 ‘아는 자‘다. 믿는 자가 아니라 아는 자. 이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샤먼의 세계에서 믿음은 설 자리가 없다. 오로지 지식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샤먼은 무엇을 아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아는 걸까?
샤먼의 힘은 마음대로 황홀경에 빠져들어 다른 의식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경우에 따라 향정신성약품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그러지 않기도 한다. 샤먼은 신도 정령도 아니지만 신과 정령을 알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샤먼은 중재자이자 여행자이며, 윌리엄 제임스가 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탐험한 뒤 평범한의식 세계로 돌아온다.  - P402

 황홀경에 빠졌을 때 샤먼의 의식 상태를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는 샤먼들에게 자연스럽게 ‘미쳤다‘는 꼬리표를 붙인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 판단인가?
정신이 멀쩡한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였던 카를 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물리적 존재만 가능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거의 웃음이 나올 만큼 우스꽝스러운 편견이다. 사실 우리가 가장 가깝게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 양식은 정신적인 것이다. 반면 물리적존재는 추론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감각이 전달해주는정신적인 이미지들을 통해서만 물질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 P403

샤먼은 자연을 사랑한다. 성 프란체스코의 전통을 따르는 셈이다.
그들은 자연계를 자신과 동등한 존재, 가족으로 본다. 샤먼은 동물들을 가엾게 여기지 않고, 그들의 우월한 지혜를 끌어다 쓰는 것을목표로 삼는다. 샤먼의 또 다른 특징은 작업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샤머니즘은 사람들(나도?)이 침묵의 명상으로는 몇 년이나 걸릴수도 있는 경험을 몇 시간 만에 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영적인 지름길을 약속해준다. 인류학자였다가 샤먼으로 변신한 마이클 하너의 말이다. 내게는 이 말이 한없이 매력적이다. 솔직히 지름길을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 P403

내가 지금까지 탐색했던 모든 종교 중에서 유대교의 역사가 가장길다. 유대교도들은 수피교도들이 뱅글뱅글 돌기 시작한 때, 불교도들이 명상을 시작한 때, 라엘교도들이 이성의 옷을 입기 시작한 때로부터 수천 년 전에 이미 유일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이것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기술은 번쩍거리는 새것이 좋지만, 종교는 오래돼서 곰팡내를 풍기는 것이 환영받는다. 멋지게 낡은 것. 물론 오랜 역사가 반드시 진리와 동격은 아니다. 사람들은 아주 오랫동안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믿음이 진리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종교적 진리는, 예를 들어 산술적 진리와는 다른 것 같다. 종교적 진리는 훌륭한 시나 소설의 진리와 같다. 우리가 지금도 셰익스피어를 읽는 것은 그의 글이 좋을 뿐만 아니라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믿음의 문제에서는 오랜 생명력이 확실히 중요하다. 나는 유대교의 점수판에 조용히 몇 점을 더한다. - P442

모든 종교에는 창조설화가 있다. 카발라도 예외가 아니다. 카발라의 창조설화는 지금까지 내가 접해본 어느 창조설화 못지않게 화려하고 환상적이다. 기본적인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신이 우주를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신이 우주를 창조하던 중에, 어이쿠! 이런, 우주가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지금 우리는 그 파편들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이 깨진 조각들을 다시 하나로 붙여서 이 세상을 수리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따라서 티쿤, 즉 ‘수리(修理)‘는 카발라의 핵심 개념 중 하나다(유대교도 마찬가지다). 카발라 추종자들은 우리 각자가 세상의 수리를 돕기 위해 자신과 자신의 의식을 수리해야 하는 독특한 과제를 안고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이 상승효과를 낸다는 것이 카발라의 가르침이다. 물질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미츠바, 즉 선행이 신적인 영역에서 반향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 P464

"유대교는 운전과 같아요." 대니얼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운전을 배우려면 규칙을 알아야 하죠. 빨간 신호등의 뜻은 무엇이고, 양보 표지의 뜻은 무엇인지 알아야 해요. 제한속도도 지켜야하고요. 하지만 운전을 순전히 규칙의 집합체로만 보는 건 멍청한짓입니다. 우리가 차를 운전하는 건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예요. 어쩌면 아주 특별한 장소가 목적지일 수도 있겠죠. 때로는 순전히 운전하는 것이 즐거워서 차를 몰기도 합니다. 규칙은 운전이라는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에요."
이 이야기가 나를 사로잡았지만 나는 아직 항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럼 누가 봐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유대교의 규칙들은 뭐죠? 그러니까 항상 오른쪽 신발을 먼저 신어야 한다는 규칙 같은 것 말이에요. 그런 규칙에 무슨 목적이 있겠어요?
"오른쪽은 상냥함을 상징하고 왼쪽은 엄격함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하루를 먼저 상냥함으로 시작한 뒤에야 엄격함을 덧붙입니다. 신발을 신는 규칙은 그것을 일깨워주는 장치일 뿐이에요." - P495

웨이트리스가 우리에게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모세가 봤으면 자랑스러워했을 법한, 단단한 판으로 되어 있다. 그때 문득 머릿속에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신과 종교의 관계는 음식과 메뉴판의 관계와같구나. 메뉴판과 종교는 모두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해준다. 웨이터가 우리에게 메뉴를 추천해줄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우리다.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자신이 신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메뉴판을 읽었으므로 식사를 잘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전자의 행동이 후자로 이어질 수는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메뉴판과 종교는 모두 우리를 유혹하며 여러 약속들을 내놓지만 그 약속들을 항상 지키지는 않는다. 메뉴판과 종교는 또한 우리 앞에 즐거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면서 지나치게 공들인 설명을 내놓지만 우리는 그 설명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건 독립 농장에서 키운 쇠고기로 만든 카르파초를 주문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다. 훌륭한 종교는 훌륭한 메뉴판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가격을 솔직하게 알려준다. 그리고 그가격은 비록 조금 비싸기는 할망정 항상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 P499

우리는 결코 자신의 과거에서 완전히 도망칠 수 없으며,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가 과거의 지혜를 한 모금씩 마시면서 그들의진리를 빨아들이더라도 그들은 언제나 ‘타자(他者)‘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최대한 바랄 수 있는 것은 이 지혜의 조각들이 우리의골수로 스며드는 것이다. 이런 일은 내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것보다 더 흔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가 기본적으로 엉망진창인데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엉망진창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해진다.
사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목표다. 좋은 종교의 목표. 우리 자신 속에 있는 가장 불쾌한 부분들을 단순히 수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랑해도 될만한 것으로 바꿔놓는 것. 융은 "우리의 어둠이 의식을갖게 만드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기도와 명상 같은 영적인 체조가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이런 변화의 연금술은 궁극적으로 신비로운 과정으로 남아 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이것을 은총이라고 부르고, 불교도들은 실제(實際)라고 부르고, 도교 추종자들은 아예 이름조차 지으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항상선물일 뿐, 우리에게 마땅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일부러 찾기를 멈춘 뒤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 P507

한편 나의 도쿄 경험에는 아직 속편이 없다. 나는 이미 속편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기대야말로 경험의 커다란 적이니까. 그래도 나는 계속 기다린다. 가끔 이쪽저쪽으로 조금씩 방향을 바꿔가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 P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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