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속에서는 기억하고 싶은 마음과 잊고 싶은 마음이 이미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 몇 달 후 루카는 슬픔에 잠겼던 처음 며칠을 낭비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가끔씩 후회할 것이다. 슬픔이 자신을 관통해서 더 철저히 무너졌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잊어버리는 일이 고정되고 습관이 되면서 자신이 아빠를 배반했다는 기분이 들기때문이다. 아빠의 왼쪽 눈썹 위에 있던 사마귀, 거칠고 작은 컬로 이뤄진 곱슬머리, 웃음소리, 밤에 루카의 침대에서 함께 책을 읽을때 머리에 닿던 까끌까끌한 턱, 나중에 루카는 아빠와 관련된 이런 세세한 기억이 지워진 이유는 자신이 비겁해서라고 오해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은 이런 미래를 전혀 모른다. 지금 무슨 일을 하든 점점 기억이 상실되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이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도 모른다. 지친 루카는 기억을 밀쳐내고 쫓아버린다. 그러고는 마음속으로 나이로비, 토론토, 홍콩의 지리학적 특성을다가 이내 엄마의 무릎 위에서 부드럽게 코를 곤다. - P256
레베카가 털어놓은 사연을 들으면서 루카는 이것이 모든 난민의 공통점이고 그들을 연대하게 만드는 요소임을 깨달았다. 비록 떠나온 나라와 환경은 다 달라서 누구는 도시에서 살았고, 누구는시골에서 살았고, 누구는 중산층이고, 누구는 가난하고, 누구는 고학력이고, 누구는 문맹이고, 누구는 살바도르인이고, 온두라스인이고, 과테말라인이고, 멕시코인이고, 마야인일지라도 다들 힘든 사연을 기차 위에 실은 채 엘 노르테로 향한다. 레베카처럼 믿어도 될만한 사람을 만나 자기 사연을 조심스럽게, 한두 명에게만 털어놓으며 기도하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터진 수류탄처럼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괴로운 사연을 털어놓고 고통을 파편처럼 날리는 사람도 있다. 그리하여 어느 날에는 불현듯 자신의 짐이 가벼워졌음을 깨달을 수도 있다. 루카는 그렇게 터지면 어떤기분일지 궁금하지만 지금은 불발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공포는 마음속에 단단히 밀봉하고 안전핀은 제자리에 꽉 고정한 채로. - P275
"너희들에게 과달라하라가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구나." 남자는 미소를 짓고, 자신을 바라보는 루카와 눈이 마주친다. 덩치가 어찌나 큰지 저 마체테를 이쑤시개로 쓸 수 있을 듯하다. 루카는 겁을 먹고 다시 엄마 옆으로 간다. "아저씨 이름은 다닐로야. 너희들 목적지가 어디든 거기 도착해서 일자리와 좋은 집을 구하고, 잘생긴 미국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서 살다가어느 날 할머니가 되어서 손자를 재우려고 침대에 눕혔을 때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렴. 옛날 옛날에 과달라하라에서 다닐로라는 좋은 아저씨를 만났고, 아저씨가 너와 함께 걸어주었고, 얼간이들이 얼씬도 못 하도록 마체테를 휘둘렀다고." 그 말에 레베카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린다. - P307
리디아와 루카 그리고 솔레다드와 레베카는 앞으로 가능한 한 함께 여행하자고 입 밖으로 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네 사람 모두본능적으로 그렇게 합의했다고 받아들인다. 이번 여행에서는 어찌나 많은 일이 터지는지 1시간이 1년 같지만 단지 그래서만은 아니다. 트라우마에서 비롯되는 유대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을 함께한다는 연대감 때문이다. 시련과도 같은 이 여정과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 늘 그들을 따라다니는 공포, 그들을 잠식하는 슬픔과 피로를 다른 사람은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계속 북쪽으로 가야 한다는 공동의 결의가 있고, 그것이 그들을 하나로납땜해버려서 이제는 가족이나 다름없다. - P341
기차에서 내린 그들은 무작정 달린다.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생각해서가 아니라 도망쳐도 소용없다는 생각과 싸우기 위해서다. 공포심에 내몰려 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잡히면 여기까지 힘들게 계속해온 전진이 급격히 끝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했던 모든 고생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이제 최선의 결과는 직분에 충실한 요원에게 잡히는 것이다. 그들을 억류하고 조사한 다음, 그들의 여행 전부를 지워버리고 원점으로 돌려보낼 사람. 그것이 최선의 결과다. 반면 이 체포는 행정 업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을 조사하고 지문을 채취하고 집에 돌려보내려고 대기 중인 요원은 아무도 없을지 모른다. 대신 이 체포는 훨씬더 악랄한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 납치나 고문, 금품 강탈, 손가락을 자르고 사진을 찍어서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협박 문자를 보내는 범죄로 가족이 돈을 보내지 않으면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어갈것이다. 이런 사연은 들판의 바위처럼 흔하다. 이걸 모르는 난민은없다. 그래서 모두 달린다. -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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