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가을 내가 광저우에 도착하였을 때 이른바 중국 ‘대혁명‘에 뛰어들어 투쟁하기 위하여 모인 조선인은 겨우 60명에 불과했고, 그 대부분이 의열단의 테러리스트였다. 그러나 1927년까지 800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광둥으로 속속 몰려들었다. 우리 조선의 활동적 지도자의 정예가 여기에 다 집결한 것이다. 모두가 혁명적 정치가였으며, 대개는 지식인이었다. 일본에서는 노동운동 지도자가 대략 20명 가량 왔고, 만주에서는 공산청년동맹원이 많이 몰려들었다. 우리들의 평균나이는 23세였다. 일부 중학생은 열너덧 살밖에 안되었고, 800 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도 마흔이 채 안 되었다.
만주의 독립군 약 400명이 의용병으로 왔고, 시베리아에서는 러시아에서 10월혁명 이래 계속 투쟁한 경력을 갖고 있거나 다년간에 걸쳐서 시베리아 유격대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100명 이상 왔으며, 또한 국내에서도 100명이 왔다. 모스크바에서 직접 훈련을 받은 마르크스주의 학생 30명도 보로딘의 고문단에 끼어 함께 왔다.
조선독립군 출신자 400명의 대부분을 제외하고는, 앞에서말한 800명은 거의 다 공산주의 사상에 동조하고 있었으며, 일부는 공산당원이었다. - P203

다음으로 통일된 민족주의 정당을 만드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결정되었다. 이것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당은 국내에서는 만들 수가 없었으므로 의열단을 중심으로 하여 해외에서 발전시켜나가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았다. 의열단의 명칭을 조선민족독립당으로 고치고, 새로 11명의 위원을 선출하였다.
마침내 분파주의에 대해 승리하였다. 조선혁명청년연맹과 민족독립당 두 개가 공개적인 조직이었으며, 비밀단체인 K.K가 저변을 잇는 통일의 끈을 장악하였다. K.K는 보로딘과 모스크바에서 보낸 참모부와 직접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 P206

1921년에 조선소비에트위원회 밑에 시베리아 소비에트의 일부로서 조선인 자치정부가 수립되었다. 당시 시베리아에는 조선인이 약 70만명 정도 살고 있었다(우리의 추정에 의하면현재 소련에는 대략 80만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다. 러시아인, 조선인, 에스키모인, 소수의 일본인과 약간의 몽골인을 합한 총 400만 명의 시베리아 인구 중에서 조선인의 수는 큰 비중을 차지했다). - P208

세 사람 모두 노동자였는데, 단정하고 지적인 얼굴로 보아 학생 같아 보였던 뤄류메이(羅劉梅)라는 소녀는 칠흑 같은 머리를 짧게 자른 무척 예쁜 소녀였다. 그들은 앞으로 일으킬 총파업에 대한 선전활동을 하고 유인물을 배포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거리를 끌려 다니면서도 그들은 공산청년 인터내셔널 노래를 소리 높이 불렀으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면 세 사람을 생각한다.
수백 명의 군중들이 형장까지 따라갔지만 울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들을 쫓아 거리를 뛰어가는 동안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경찰이 나를 동조자로 보고 체포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사람들은 이 일을 단지 흥밋거리로만 생각하는것 같았다.
"이렇게 잔혹한 나라에서는 살 수가 없어. 절대로, 절대로,
못 살아. 이들은 사람도 아니야."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인력거가 멈춘 것은 3시였다. 무거운 사슬이 벗겨지자, 세사람은 형장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 한 청년의 신발이 벗겨졌다. 그러자 그는 굉장히 느린 동작으로 허리를 구부려 신을 고쳐 신는 것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단 몇 초라도 더 살고 싶어 하는구나.‘
세 사람은 모두 냉정하였다. 총될 지점에 도착해서 10명의 병사들이 정렬하는 사이에 그들은 구호를 소리 높이 외쳤다.
"제국주의와 국민당을 때려 부수자! 중국혁명 만세! 때려잡자 장제······.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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