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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털이 무성한 손이 불쑥 내 코앞까지 뻗어와 멈추었다. 그의손아귀에 펴든 패스포트 속에서 긴 머리의 아가씨가 활짝 웃고 있었다.
"예쁘군요."
그들에게는 좀 허풍스런 찬사를 보내야 하는 법인데 오후의 피곤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나른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내 앞에 선 우람한 GI는 몸집보다는 민감한 듯했다. 금방 씰쭉해지더니 사진을 나꿔채듯 제 눈앞에 가져다가 새삼스럽게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윽고 제품에 안심이 되는지 다시 입을 헤벌렸다.
나도 이때를 놓칠세라 재빨리 직업의식을 발휘했다.
"내가 본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답군요. 당신은 행운아예요. 물론 그녀를 위해 초상화를 그리셔야죠. 어때요? 이 고운 실크 스카프에다 그리면."
나는 우선 한 귀퉁이에 용의 모양을 날염한 번들한 인조 스카프를 권해보았다. 그게 우리 초상화부로서는 제일 수지가 맞는 품목이었다. - P13
그들은 늘 몹시 바빴고, 난 또 얼마나 바빴었을까. 세상에는 재미난 일들이 너무나 많았고 좋아할 것이 연달아 널려 있어서 혁이 오빠도 욱이 오빠도 눈이 돌 지경이었고, 난 또 그것을 덩달아 하느라신이 났었다.
우리집에 무상출입하는 오빠들의 유쾌한 친구들을 좋아했고, 그들이 즐기는 스포츠와 유행 음악에 덩달아 열중했고, 그들이 반한 영화배우에 나도 반했고, 그리고 부드럽고 말랑한 손과 구수한 음식 솜씨를 가진 우리들의 어머니를 또한 얼마나 사랑했던가.
나는 벽면의 난잡한 진열품들을 샅샅이 훑어보고나서 다시 한 번기타줄을 튕기고 자리에 엎드렸다.
가슴 밑 명치께가 요사이 늘 그렇듯이 체증 비슷한 거북함으로 보깨기 시작했다. 나는 엎드린 채 그 밑에 베개를 괴고 지그시 눌렀다. 난 알고 있었다. 그 속에서 사랑하고픈 마음이 얼마나 세차게꿈틀대고 있는지를.
그러나 도대체 누구를 덩달아, 누구를, 무엇을 좋아할 수 있을 것인가? - P23
‘마리아 당신이 아니고서야 누가 알기나 하리까.‘
무언가 뿌듯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마리아, 당신만은 아시리다…….‘
청순한 동경이 언 몸을 깃털처럼 감쌌다.
‘마리아, 당신이 아니고서야 누가 알기나 하오리까……. 마리아,
당신만은 아시리다. 그 다음은 뭐더라….
문득 나는 내가 전에 애송한 시의 구절을 생각해내려고 골몰하고있음을 깨닫는다. 남의 흉내, 빌려온 느낌은 그것을 깨닫자 흥을 잃고 싱거워졌다. 그리고 가식 없는 나의 것만이 남았다. 그것은 무섭다는 생각과 춥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것만이 온전한 나의 것이었고 그 느낌들은 절실하고도 세찼다. 나는 어두운 길을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무섭다‘를 거푸 뇌까리며 ‘무섭다‘ ‘춥다‘에 떠밀리듯이달음질쳤다. - P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