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그 사람이 소파에 앉아 시리얼을 먹다가 불현듯 어떤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그것에 대해 흥분해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이를테면 사람들이 이메일 마지막에 겨우 키보드 네 번 더 누르는 수고를 안 하려고 머리글자 하나만으로 서명하는 것이 얼마나 자기를 짜증나게하는지 모른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 혼돈이 그 사람을 집어삼킬 것이다. 혼돈은 부러져 떨어진 나뭇가지나 질주하는 자동차, 총알 하나를 거느리고 밖에서 치고 들어가 그를 으스러뜨릴 수도 있고, 아니면 반란을 일으키는 그 사람의 몸속 세포들과 함께 안에서 박차고 나와 그를 해체해버릴 수도 있다. 혼돈은 당신의 화초를 썩어 물러지게 하고, 당신의 개를 죽이고, 당신의 자전거를 녹슬게 할것이다. 당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을 부식시키고, 가장 좋아하는 도시를 무너뜨리고, 당신이 간신히 쌓아올린 모든 성스러운 장소를 폐허로 만들 것이다. - P15
1906년 어느 봄날 아침, 난데없이 닥친 지진으로 그가 수집한 반짝이는 표본들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 전까지는. 수백 개의 유리단지가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고, 그의 어류 표본들이 깨진 유리와 넘어진 선반들에 의해 절단되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최악의 피해를 입은 건 이름들이었다. 조심스럽게 유리단지에 넣어둔 주석 이름표들이 온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창세기가 거꾸로 펼쳐진 끔찍한 지진 속에서, 그가 꼼꼼하게 이름 붙인 물고기 수천 마리가 다시 수북이 쌓인 미지의존재들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이 콧수염을 기른 과학자는 평생의 노고가 자기 발치에서 내장을 쏟아내는 파괴의 잔해 한가운데서 이상한 짓을 했다. 그는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그 지진이 전하는 명백한 메시지, 즉 혼돈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질서를 세우려는 모든 시도는결국 실패할 운명이라는 메시지에 그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소매를 걷어붙이고 허둥지둥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세상의 하고많은 무기 중에서 바늘 하나를 찾아 들었다. 그는 엄지와 검지로 바늘을 잡고는 바늘귀에 실 한 올을 꿰더니 그 파괴의 잔해에서 그나마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물고기 하나를 겨냥했다. 그러고는 한 번의 유연한 동작으로 바늘을 물고기의 목살에 찔러 넣어 이름표를 꿰매붙였다. 폐허에서 구해낼 수 있는모든 물고기에 이 작은 동작을 반복했다. 이제는 절대 이름표를 유리단지 안에 어정쩡하게 넣어두는일은 없을 것이다. 대신 각자의 이름을 바로 그 물고기의 피부에 꿰매 붙였다. 목에, 꼬리에, 눈알에 꿰매 붙인 이름들. 이 작은 혁신은 도전적인 소망을 담고 있었다. 이제 그의 작업은 혼돈의 맹공 앞에서도 안전하게 버호받을 것이라는, 다음번 혼돈의 공격 때는 그의 질서가 흔들힘 없이 우뚝 서 있을 거라는 도전적인 소망. - P17
루퍼스가 죽은 이후 데이비드의 일기장은 색채들로 폭발하기 시작했다.24 들꽃, 고사리, 아이비, 나무딸기 등 이 세계에서 뜯어올 수 있는 자연의 모든 파편을 꼼꼼하게 스케치하려 했던 것 같다. 그림의 기교는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그 그림들은 문질러 번진 연필 얼룩, 잉크 자국, 지우개 자국, 지나치게 열심히 그리려다 흘린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그 미숙함 속에는 그의 집착과 필사적인 마음, 자신도 모르는 것들의 형상을 붙잡아두기 위해 근육의 온 힘을 동원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 P30
심리학자들은 이처럼 괴로운 시기에 수집이 줄 수 있는 달콤한 위안에 관해 연구해왔다. 수십 년간 강박적인 수집가들과 상담해온 심리학자 워너 뮌스터버거 Werner Muensterberger는 《수집: 다루기 어려운 열정Collecting: An Unruly Passion》에서 수집 습관이 모종의 "박탈 혹은 상실 혹은 취약성"이 발생한 후 급격히 심각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새롭게 하나를 수집할 때마다 수집가에게는 폭발적인 도취감을 주는 "무한한 힘의 환상"이 흘러넘친다고 말했다. 그라나다대학에서 수년간 수집가들을 연구한 프란시스카 로페스-토레시야스Francisca López-Torrecillas는 스트레스나 불안을 겪는 사람들이 수집에 의지해 고통을 달랜다며 비슷한 현상을 지적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무력함을 느낄 때는 강박적인 수집이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뮌스터버거가 지적하듯, 유일한 위험은 여느 강박과 마찬가지로 수집 습관이 "신나는" 일에서 "파멸적인 일로 바뀌는 어떤 지점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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