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본성과 양육(nature and nurture)에 관한 책은 이미 많이 나오지 않았는가! 마음이 백지라고 믿는 사람이 아직도 존재한단 말인가? 아이를 한두 명 키워본 사람, 이성애적 관계를 경험해 본 사람, 아이들은 언어를 학습하는 반면에 애완 동물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에 주목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의 재능과 기질은 어느 정도 타고난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유전과 환경으로 단순화한 이분법에서 벗어나 모든 행동은 그 둘의 상호 작용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지 않았는가?" - P7
그럼에도 모든 사회는 그 나름의 인간 본성이론과 함께 유지되며, 우리의 주류 지식인 사회에도 하나의 명확한 이론이 존재한다. 그 이론은 공공연히 표명되거나 채택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거의 모든 신념과 정책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썼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편안하게 해 주는 확신의 구름에 둘러싸인 채 살아간다. 그 구름은 여름날의 파리 떼처럼 그를 따라 이동한다." 오늘날 지식인들의 경우 그 확신의 많은 부분이 심리학 그리고 사회적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나는 그 확신들을 ‘빈 서판‘이라 지칭하고자 한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은 어떤 고유한 구조와도 무관하며, 사회나 그 자신이 그 위에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새겨 넣을 수 있다는 개념이다. - P27
인간 본성에 대한 이 이론, 즉 인간 본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이다. 모든 종교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론이 포함되어 있고 인간 본성에 대한 이론들이 각각의 종교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현대 지식 세계에서는 빈 서판이 세속 종교가되었다. 그것은 가치의 원천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그 이론이 무에서 생겨나는 복잡한 마음이라는 믿기 힘든 기적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회의론자들과 과학자들이 그 학설에 도전하면 어떤 신자들은 신앙의 위기에 빠지고 또 어떤 신자들은 이교도와 불신자들을 향해 격렬한 공격을 퍼붓는다. 그러나 많은 종교적 전통들이 결국에는 과학의 명백한 위협들(가령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의 혁명적 이론)을 참고 받아들였듯이, 우리의 가치관도 빈 서판의 종말을 이기고 꿋꿋이 살아남을 것이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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