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화 원칙이라는 계급투쟁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왜 상층계급이 페미니즘 투쟁을 도용하는지 그 저의가 분명하게 설명된다(인종차별주의도 마찬가지다. 계급투쟁의 동력은 왜백인 노동자 하층계급에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가 더 널리퍼져 있는지 설명해준다). 계급투쟁은 엄격히 헤겔적 의미에서 ‘구체적 보편자‘다. 계급투쟁은 다른 투쟁의 ‘다름‘ (다른 적대)과 관련해 이 다름에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며, 어떤 방식으로 다른 투쟁과 관계하는지 (중층)결정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슬람 세계에서도 이와 유사한 계급 동력이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탈레반은 테러를 무기로 삼아 통치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그룹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2009년 봄 탈레반이 파키스탄의 스와트 계곡을 점령했을 때 뉴욕타임스」는 탈레반이 "소수의 부유한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깊은 균열을 이용한 계급 봉기를 부추겼다"고 보도했다. - P74

유럽과 미국의 종교적 근본주의 비판은 끝없이 변모하고있는 해묵은 주제다. 사방에서 근본주의자들을 조롱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자기만족적 오만함은 계급투쟁의 중요성이라는 진정한 문제를 감추고 있다. 조롱의 반대인 감상적 태도도 마찬가지다. 난민과의 감상적 연대,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우리‘ 스스로를 유죄로 단죄하는 잘못된 감상적 자기 비하가 그것이다. 우리의 실질적 과제는 오히려 ‘우리‘와 ‘저들‘ 노동자계급 사이에 가교를 구축하여 연대 투쟁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상호 비판과 자기 비판이 가능한 연합) 없이는 계급투쟁은 진정 문명의 충돌로 퇴행한다. 그래서 우리는 또 하나의 금기를 버려야 한다. 난민을 바라보는 이른바 ‘평범한 사람들‘의 우려와 두려움을 인종차별적 선입견으로, 심지어 노골적인 네오파시즘의 표현으로 매도하지 말아야 한다. 이들을 포용할 유일한 대안이 정녕 페기다와 그 패거리여야만 할 것인가? 흥미롭게도 ‘급진좌파의 버니 샌더스 비판에도 똑같은 동기가 엿보인다. 윌리엄 카우프만이 말한 것처럼 급진좌파는 샌더스가 버몬트주의소농과 노동자들(평소 보수 공화당을 지지하던 사람들)과 밀접한 교류를 나누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샌더스는 그들의 우려와 두려움을 백인의 인종차별적 헛소리라고 무시하지 않고 이를 경청한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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