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생물은 야성을 포기한다. 자기를 지키기 위한 공격성을 접고, 자기 몸에 닥친 어떤 운명도 감수하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래서 사람 가슴에 안겨 우리 집에 들어서는 다친 야생동물은 그저 꼼짝 않고 가만히 있을 뿐이다.
마치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마지막 삶의 에너지를 아껴 두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환자 동물이 우리 집 현관을 들어선다. 때로는 들어오자마자 숨을 거두는 동물도 있다. "방금 전까지 살아 있었는데..." 하며 안고 온 사람은 눈물을 글썽인다. - P197

옛날, 그래 봐야 40년도 채 안 된 일이지만 인간도 동면을 했었다. 대지는 얼어붙고 눈으로 뒤덮인다. 나뭇잎도 거의 다 떨어지고가지에 매달려 있어도 잎의 본래 기능인 광합성은 하지 못하니 개점휴업인 셈이다. 그렇다면 생물의 우두머리인 인간이 뭣 때문에 애써 일해야 하는가. 설마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이 고장농부들은 다시 봄이 오기까지의 겨울 한 철을 다른 동물들을 흉내내듯 반동면 상태로 시간을 보낸다.
오전 10시가 지나도록 자다가 파친코를 하고 돌아와서는 술을 마시고 다시 한잠 잔다. 아니면 몇 사람이 모여 화투를 치다가 또술판을 벌인다. 파친코나 화투라고 해 봐야 푼돈이나 쓰는 정도고술도 자기들이 빚은 탁주다. 이렇게 봄갈이가 시작되는 4월 중순까지 반동면에 들어간다.
12월의 망망한 벌판을 오가는 사람은 수의사와 우편집배원 그리고 빚을 채근하러 다니는 빚쟁이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길에서 마주치면 "모두들 동면 중이지요?" 하고 서로 인사말을 주고받는다.
가을에는 식욕이 당긴다고들 한다. 더운 여름이 지나고 쾌청한 날씨 속에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지거나, 혹은 음식의 수확기인 가을에 식욕을 돋우는 것들이 속속 나오기 때문이라는 등 식욕을 증진시키는 갖가지 이유가 거론된다. 하지만 단순히 ‘식욕이 당긴다‘
는 설명이 가장 맞는 것 같다. 식욕이 당기는 것은 동면을 위한 본능이기 때문이다. - P204

여기서 큰곰은 놀라운 수법을 사용한다. 이들은 수정란의 착상을늦추는 방법으로 태아의 발육을 지연시킨다. 착상되지 않으면 수정란이 어미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 수정란이 크지 않는 것이다. 때가 돼서 분만할 시기가 다가오면 ‘이제 슬슬 키워 볼까 하는신호를 받은 자궁벽이 그때까지 그대로 놔뒀던 수정란을 살짝 잡아착상시킨다. 이런 식으로 작은 새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정말 기이한 일로 많은 연구가가 ‘왜?‘라는 물음에 도전했다. 여러 설이 등장했고 가장 그럴 듯한 다음 설이 정설이 되었다. 우선거대한 몸뚱이를 가지고 이 추운 고장에서 겨울을 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몸에 지방을 축적하고 그래도 충분치 않아 겨울에 자는것으로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한다. 이것이 바로 동면이다. 겨울에는 어느 동물이나 활동이 둔해지는데, 그만큼 다른 생물로부터의 공격이 줄고 안전성이 높아진다. 그렇다면 가장 신경 쓰이는 새끼키우기의 첫 시기를 이때로 맞추면 제일 좋지 않을까.
그런데 그 시기는 동면 기간이기도 하다. 게다가 꾸벅꾸벅 졸면서 새끼를 키우려면 되도록 새끼가 작아야 좋다. 작으면 어미 곰의 에너지 소모도 그만큼 줄어들 테니까. 작게 낳으려면 교미는 늦출수록 좋은데 동면 직전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그 시기는 동면을 위해 지방을 축적하는 때와 겹친다. 그래서 그 해결책으로 번식을 위한 여러 의식은 비교적 한가한 초여름에 치른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수정란이 어미의 자궁 속에서 쑥쑥 자라면 ‘작게 낳아 크게 키운다‘는 방침은 헛일이 되고 만다. 이 모순을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수정란을 살아 있는 상태로 자궁 속에 보관했다가 적당한 때에착상시켜 키우는 묘수, 즉 착상 지연의 시스템이 확립된 것이다. 이상이 저 거대한 자궁 안에서 연출되는 드라마의 줄거리다. - P216

해는 벌써 서쪽 언덕 위에서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며 지고 있었다. 나도 주위를 정리했다. 새끼 여우가 탄생하면 3월도 끝난다.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 전조등에 비친 눈토끼를 보았다. 털갈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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