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수사슴이 부럽다. 남자라고 1년 내내 긴장해서 살아야한다면 너무하지 않은가? 가끔 쉬고도 싶다. 남자의 위신이라는것이 이른 봄에 두릅나무의 눈이 꺾이듯 떨어져 나가 한동안 사내임을 내팽개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나 아이들의 심정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남자의 체면을 내세운 쓸데없는 싸움도없지 않을까? 그러다가 모두들 긴 겨울 채비에 들어가려는 가을이되면 수놈은 명예를 되찾고 짧고 깊게 산다. 아, 멋지지 않은가. 일본사슴들에게 그때가 바로 10월인 것이다. 보기에도 그 모습이 늠름해서 나도 모르게 ‘이번 겨울에도 힘내게, 친구!‘ 하고 말을 건네는데 첫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 P166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아주 오랜 옛날 대풍작의 가을에 뚝뚝 도토리가 떨어진 자리는 땅 위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늪지대일 수도있고 호숫가였을 수도 있다. 물위에도 물론 떨어졌을 것이다. 도토리는 물에 떠내려가 가까운 바닷가 모래밭에 얹히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날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땅속의 수분을 빨아들인다. 다음해 도토리는 싹을 틔운다. 도토리의 두툼한 떡잎은 대량의 전분과 지방의 저장고로, 태어나는 어린눈을 키울 충분한 영양분을 가지고 있어 다음 해의 성장까지도 도울 수 있다. 이렇게 10년이 지나면 어린 떡갈나무 숲이 되고, 백년이 지나면 울창한 숲을 이룬다.
그리고 2백 년이 훨씬 넘으면, 보는 사람의 입이 쩍 벌어질만한 거대한 숲이 된다. 떡갈나무 숲을 보며 이 숲이 탄생할 무렵과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의 과정을 상상해 보았다. 만일 내 상상이 틀렸다면 조물주에게 듣는 수밖에 없겠지. - P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