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어느 날, 알 수 없는 이유로 내 마음속의 싸움이 멈춘다. 무표정 훈련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죽음에 대한 명상이 평소보다 힘겨웠나? 하필 안 좋을 때 담력 훈련을 치렀기 때문일까? 아무튼 초인에 대한 매혹이 한순간에 증발해버린다. 그리고 아버지가 내 눈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보인다. 아버지는 친구가 없고 사랑이 없는, 따뜻한 손길을 받을 줄 모르고 주는 법도 모르는, 동물들마저도 겁을 먹게 만드는 남자다. 심지어 어머니도 남편에게 친근하게 말하지 못하고 이름조차 부르지 못한다. 라디오도 몰래 숨어서 들어야한다. 깨우친 빛의 존재를 향한 길이라는 게 정녕 그런 걸까? 다빈치가 꿈꾸던 비행기구와 정반대가 아닌가? 아버지는 하늘을 날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 총을 쏴서 떨어뜨린다.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철책 안에 틀어박혀 있다. 나는 자유롭고 싶고, 날아오르고 싶다. 집 없이 살아야 한다면, 괜찮다. 제대로 먹지 못할지도 모른다면, 그것도 괜찮다. 개 한 마리가 보내주는 사랑의 눈길만 있으면 더이상 먹지 않아도 좋다. 살아갈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만 있다면 어떤 것도 상관없다. 사상의 스승인 아버지가 횡설수설 이상한 말을 쏟아내는 것을 막을 힘은 없지만, 적어도 아버지가 말하는 이른바 초인들의 세계에 대한 매혹은 이제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 P260

아버지가 만들어낸 빈틈없는 체계는 반항의 싹이 돋아날 가능성 자체를 잘라버렸다. 하지만 나는 결국 자유의 길을 찾아냈다. 우선 나에게는 생명 넷으로부터 조건 없는 사랑과 애정을 받을 기회가있었다. 개 한 마리, 조랑말 둘, 그리고 오리다. 나에게 우정을 베풀어준 사람들도 있었다. 엄격했던 피아노 선생님, 겁에 질려 있던 미용사, 바칼로레아에 떨어진 여고생 말이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도전하는 길을 생각과 감정과 상상력으로 열어준 책과 음악이있었다. 그렇게 나는 아주 조금씩 용기를 냈고, 돌을 하나씩 옮겨가며 나의 정신을 쌓아올릴 수 있었다. 나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상상의 대화 상대를 만들었고, 비밀 창고를 팠고, 금지된 이야기들을 글로 썼고, 나 스스로의 생각을 지닐 권리를 확인하기 위해거짓말을 했다. 그렇게 운명이 나에게 구세주를 보냈을 때, 나는 그의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몰랭 선생님은 어디서나 아름다움을 찾고 삶 앞에서 늘 경이를 느끼는 무한한 선의를 지닌 분이었다. 선생님은 내 아버지와 정반대편에 선 아버지가 틀렸음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인간들은 훌륭하다.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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