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음 돌을 빈 점에 놓는다.
아빠는 내 예상대로 다음 수를 놓고, 바둑판 오른쪽 위의 귀에 있는 내 돌들은 사라진다. 둥둥 떠서 흘러간다.
하지만 나의 대마는 무사하다. 어쩌면 앞으로 더욱 뻗어나갈지도모른다.
"바둑에도 영웅이 있네요."보비의 목소리.
민디는 내가 영웅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단지 적당한 시점에적당한 장소에 있었던 사람일 뿐이다. 해밀턴 박사는 호프풀호를설계했으니 그 역시 영웅이다. 민디는 내가 잠들지 않도록 해 주었으니 역시 영웅이다. 내가 살아남도록 기꺼이 나를 보내 준 내 어머니도 영웅이다. 내가 옳은 일을 할 방법을 가르쳐 준 내 아버지도영웅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정의하는 것은 타인들의 삶으로 이루어진 그물속에서 차지하는 자리이다.
나는 수많은 바둑알이 합쳐져 더 큰 패턴으로 변할 때까지, 그래서 변화하는 생명과 일렁거리는 숨결로 바뀔 때까지 바둑판을 바라보다가 눈을 돌린다.
돌 하나하나는 영웅이 아니야. 하지만 모든 돌이 힘을 합치면 영웅적인 일을 할 수 있어. - P401
원숭이 왕의 표정이 엄숙하게 바뀌었다.
"자네 방금 기억이라고 했나. 그럼 왕수초는 어떻게 생각하나? 자네가 읽은 그 책을 쓴 사람 말이야."
"그 사람이야 나처럼 평범한 위인이지, 뇌물을 써서 위기를 모면하고 살아남은."
"하지만 왕수초는 자기가 목격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어. 그 열흘동안 죽어간 사람들이 100년 후에도 기억될 수 있도록 말이야. 그책을 쓴 건 용감한 일이었어. 오늘날 그 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만주족에게 쫓기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내가 보기에왕수초는 영웅이었어."
잠시 가만히 있던 전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 P457
"난 그냥 늙은 겁쟁이일 뿐이야. 이 원숭이 두목아. 뭘 어떡해야좋을지 모르겠다고."
"모르기는 다 알면서. 자넨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돼."
"왜 하필 나야?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쩔 건데?"
원숭이 왕의 얼굴은 흐릿해졌고, 목소리도 점점 작아졌다.
"전호리, 양주의 백성들은 100년 전에 죽었어. 그건 무슨 수로도바꿀 수 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과거는 기억이라는 형태로 계속 살아가게 마련이고, 그래서 권력을 쥔 자들은 언제나 과거를 지우고 침묵시키려 해. 원혼들을 땅속에 묻어 버리려고 이제 자네도 과거를 알아 버렸으니 더는 무지한 방관자가 아니야. 만약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자넨 황제와 그가 부리는 혈적자와 한패가 되는 거야. 그들이 저지르는 이 새로운 폭력, 과거를 지워 버리는 작업에서 말이야. 왕수초가 그랬듯이 이제는 자네가 목격자야, 왕수초가 그랬듯이 자네도 어떻게 할지 선택해야 해. 결정을 내려야 해. 언젠가 숨을 거두는 날 오늘의 선택을 후회할지, 안 할지."
원숭이 왕의 모습은 흐릿해지다가 사라져 버렸고, 전호리는 자신의 통나무집에 홀로 남아 생각했다. 기억이란 무엇인지를. - P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