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수용한다accept‘고 말할 때, 그것은 철저히 자발적인 선택을 의미한다. 믿음은 나의 의지에 따라 믿거나믿지 않기가 대단히 어렵지만, 수용은 오로지 나의 의지에 달려 있다. 물론 객관적인 증거가 있다면 좀 더 수월하게 수용할 수 있지만 장애가 문화적 다양성을 증대시켰다는 풍부한 역사적 사례가 있다면 장애를 더 쉽게 수용할 수 있다), 근거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 당신이 장애가있는 아이를 진정 가치 있고 반짝거리는 존재로 수용하고자 한다면, 그 아이에게 다른 아이에게는 없는 천재적인 수학 능력이 있는가 혹은 예술가로서의 빛나는 재능이 보이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앤드류 솔로몬이 인터뷰했던, 장애아를 둔 어머니 루스의 말은 수용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나는 우리가 신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지금 같은 관점을 갖게 된 것은아니라고 실제로 생각해요. 사람들은 상투적인 말로 우리를 위로하려고해요. "하느님은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주십니다" 라는 말처럼요. 하지만 샘이나 줄리아나 같은 장애아는 애초에 부모에게 선물이 될운명으로 태어나지 않아요. 그럼에도 그 아이들이 우리에게 선물인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선택했기 때문이죠.
- P139

정체성이란 객관적인 대상처럼 존재하는 어떤 산물이 아니다. 정체성이 귀중한 이유는 우리가 각자의 인간적 상황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수행적 가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수행적 가치가 무엇인지는 예술품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다. 가령 반 고흐의 그림을 최고 성능의 컬러복사기를 이용해 복제한다면, 그 그림은 고ㅎ의 원작과 다를까? 수준 높은 미술평론가들조차 원작과 모작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라면, 양자의 산물로서의 가치는 동등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원작이 더 가치 있다고 믿는다. 왜 그런가? "위대한 예술품에 가치를 두는 궁극적인 이유는 예술품이 우리의 삶을 증진시켜서가 아니라 예술적 도전에 맞선 수행performance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골형성부전증‘이나 ‘암‘ 또는 청각장애가 가치 있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산물로서의 가치보다는 수행으로서의 가치를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수평적 정체성으로서 옹호하고자 하는 장애나 질병, 너무 크거나 작은 키, 인종, 특정한 정신질환, 성적 지향 등은 한 사람이 어떤 경험과 도전에 맞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역사가 체화된 인간적 속성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 P148

키가 아주 작거나 얼굴에 커다란 반점이 있는 것은 나의 책임이아니다. 하지만 그런 몸으로 태어난 것이 추하고, 존엄하지 않고, 하찮다고 여겨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나도 책임을 부담한다. 나에 대한 그런 손가락질의 원인은 세상의 잘못된 평가와 위계적 질서이지만, 그에 맞서 내 존재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선언할 책임은 우리자신에게 있다. 이것이 ‘정체성을 수용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취하는 실천적 태도이다.
- P154

자기 이야기를 자율적으로 써 내려가는 자기 인생의 저자라는 개념은 우리모두가 각자 고유한 이야기와 관점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차별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이유 역시 우리가 가진고유성, 자기 삶을 직접 작성하는 저자성authorship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이때의 ‘작성‘이란 자기 삶의 경로를 자율적으로 선택하는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자신이 걸어온 길들을 돌아보며 스스로 해명(설명)하면서, 자기 선택을 반성적reflective으로 밀고 나가는 행위까지 포함한다.
- P186

법은 이렇게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를 인간 존엄 보장의 핵심으로 삼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법은 개인의 존엄을 보호하기 위해 개인의 이야기를 삭제하기도 한다. 「정신건강복지법」을 비롯한 정신건강 관련 법체계는 지금까지 정신장애인 개개인의 이야기에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다. (특히 입원 결정과 관련된) 의사의 진단은 철저히 정신의학적 증상의 경중, 자신과 타인에 대한 해악 가능성을 분별하는 데 집중되었다. 설사 강제입원 요건에 해당하는정신의학적 증상을 보이더라도 환자 개인의 이야기는 복잡하고 풍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법체계는 의사의 ‘진단‘을 곧 강제입원및 치료라는 강력한 조치를 정당화하는 유일한 지위로 삼는, 이른바 지위 접근status approach 방식을 택하여 정신장애인의 자율성과 고유성을 간편하게 억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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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서비스의 적용 대상을 판단할 때 의료적인 기준은 물론 중요한 참조 사항이다. 그러나 뇌의 기질적 병변과 그에 따른 신체기능 수준이 의학적으로 어느 정도인지와 상관없이, 어떤 사람은 송국현처럼 27년간 시설에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 사는 바람에 혼자 자기 몸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다. 그가살아온 ‘삶의 이야기‘와 무관한 ‘신체 기능‘에 대한 판단만으로는한 사람의 실질적인 삶의 조건과 역량을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 P186

유선 씨나 혜정 씨가 충분히 자기 인생의 저자가 될 수 있다.
고 하더라도 이것을 우리 공동체가 제도적인 수준에서 고려하는 데는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유선 씨와 혜정 씨의 저자성이 ‘법 앞에서‘ 철저히 무시된다면 이를 개선할 방법은 무엇일까? 뉴욕대 로스쿨 교수 켄지 요시노Kenji Yoshino는 현대 사회에서 장애인, 소수 인종, 성적 소수자 등을 대놓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은 많이 없어졌지만, 이 사람들에게 주류 집단에 동화同化되기를 요구하는 이른바 ‘커버링 covering‘ 압력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커버링은 말하자면, 자신이 가진 비주류적인 특성을 ‘티 내지 말라‘는 요구다. 여성을 차별하지는 않지만 여성의 몸이 가진 특별한 상황(생리나 출산 등)을티 내지 말 것을 암묵적,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조직 문화,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지만 장애로 인한 특성을 숨기기를 원하는 사회 분위기 같은 것이 그 예다. 켄지 요시노는 커버링에 대한 법적인 대응 방법을 고민하면서, 그중 하나로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reason-forcing conversation‘를 제안한다. 나는 이것으로 개인의 고유성을 무시하는 법체계를 다소나마 개선할 제도적 해결책을 모색해볼 수있다고 생각한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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