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러닝셔츠 바람에 총을 들고 멍하게 앉아 있는 폴의 눈에 보이는 것은 발가벗은 채 트램펄린 위로 높이 뛰어오르는 샌디의 모습이다. 샌디는 점프를 하며 폴을 향해 웃는다. 뒷마당이 환해질 만큼 눈부신 웃음이다. 폴도 그녀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지만 그의 가슴에 어느새 슬픔이 가득 차오른다. 그는 울음을 참느라 이를 악물고있어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다. 점프를 하는 샌디의 등뒤론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평화로운 다운타운의 아침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점프를 할 때마다 샌디의 풍성한 금발은 바람에 나부끼고 커다란 두 개의 젖가슴이 그 사이에서 출렁인다. - P238
그녀는 전남편이 왜 그렇게 머나먼 땅에서 외롭게 떠돌며 살았는지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게 혹시 자기 때문이었다면 이제는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둘이 함께한 시간들이 비록 고통스럽고 힘들었더라도, 그래서 함께 늙어가는 기쁨을 가지진 못했더라도, 팔짱을 끼고 산동네를 향해 올라가던 그 순간,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았었냐고, 그렇다면 결국 상대로 인해 인생을 낭비한 것만은 아니잖냐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미국에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 찻잔을 자주 들었다놓곤 했다. - P350
그때 디제이 형의 입에서 흘러나온 취향 이란 단어가 어찌나 우아하고 향기롭게 느껴졌던지! 우리는 모두 비싼 중국음식점에서 차려낸, 듣도 보도 못한 청요리 앞에 교련복을 입고 나란히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취향을 갖는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것은 여러 보기 가운데 반드시 하나의 정답만을 골라야하는 사지선다의 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였다. 그것은 틀릴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공평하고 무사(無私)한 세계였으며 믿기에 따라선 내가 찍은 게 다 정답이 될 수도 있는 너그럽고 당당한 세계였다. - P356
사실, 스무 살 나이엔 아무것도 절실한 게 없다. 그것은 젊음이라는 빛나는 재산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욕망이 구체화된 나이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젊음은 그저 무지와 암흑의 카오스에 갇혀 있는 어설픈 가능태일 뿐, 특별한 의미는 없다. 당시 내게 필요한 건 심심함을 달래줄 만화책과 담뱃값, 그리고 아무 데고 내키는 대로 쏘다닐 수 있는 자전거……… 그 외에 또 뭐가 있었을까? 훗날, 그때 누군가 좋은 책을 추천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었더라면 내 인생이 좀더 나아졌을까? 하지만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만난 수많은 스승들가운데 그런 스승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이 가르쳐준 거라곤 그저 ‘대학 못 가면 사람 노릇 못 한다‘는 무시무시한 명제뿐이었다. 그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지만. - P372
-잘가. 나는 돌아서서 기차를 향해 뛰어갔다. 승강대에 오르자마자 기차는 곧 출발하기 시작했다. 기차가 움직이는 순간, 울컥 목이 메었다. 나는 승강대에서 머리를 내밀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게 서 있을 것처럼 나를 향해 말없이 서있었다. 우리의 초라한 방을 밝혀주었던 스탠드도 여전히 그녀의 트렁크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스탠드가 언제까지고 그녀의 방을 따뜻하게 비춰주길 바랐다. 기차역이 멀어지며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가장 슬프고 아름다웠던, 하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내 인생의 어느 한 지점과 영원히 작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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