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햄프셔 주의 작은 마을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돼 우연히 마을 끝에서 숲으로 사라져 가는 길을 발견했다.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니었다. 그 유명한 애팔래치아 트레일‘ 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 트레일은 장거리 종주 등반의 원조로 불린다. 미국의 동부 해안을 따라 고요히 솟아있으면서 은근히 사람의 발길을 부르는 애팔래치아 산맥 위로 굽이굽이 3천360킬로미터나 흐르는 길이다. 조지아 주에서 메인 주까지 14개 주를 관통하면서 이름만 들어도 맘이 설레는 블루리지, 스모키, 컴벌랜드, 그린 마운튼, 화이트 마운튼을 지나간다. - P13
등산 장비를 사기 위해 다트머스 협동조합의 야외용품 전문점에 들어섰을 때, 그 일이 얼마나 무지막지할 것인가 하는 느낌이 처음으로 와 닿았다. 내 아들이 거기서 방과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처신을 잘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예컨대 물건값을 듣고 "나랑 장난치자는 거냐?" 하는 말을 내뱉어 속을 내보인다든지, 장비의 올바른 손질법 등을 가르쳐 주는 직원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는다든지, 여성 스키 모자와 같은 것을 써보면서 딴청을 피운다든지 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 P19
181킬로그램이나 되는 흑곰이 캠프장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상황서 암흑의 텐트 안에 당신 혼자 누워 있다고 상상해보라. 텐트크기만 한 엉덩이를 텐트 천에 쓱쓱 문대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거친 숨소리, 육중한 발바닥, 찐득찐득한 혓바닥, 곰의 움직임에따라 흔들리는 주전자나 냄비의 덜거덕거리는 소리, 낮게 으르렁거리면서 괴이하게 쿵쿵거리는 소리를 상상해보라. 당신과 혹곰사이에는 바람에 떨리는 얇은 텐트 천밖에 가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 갑자기 곰이 텐트 안으로 코를 들이민다. 순간 팔 한쪽이 따끔하게 물린 것 같은 통증을 느낄 때 솟구치는 뜨거운 아드레날린을한번 상상해보라, 곰이 텐트 입구 안쪽에 받쳐 놓은 배낭을 뒤질때 갑자기 당신은 생각날 것이다. ‘배낭에 스니커즈가 있다.‘ 알겠지만 곰은 스니커즈를 좋아한다. ‘오, 하느님! 내 옷 속에도 스니커즈가 있네, 여기도 있고, 발 쪽에도, 등 밑에도, 제기랄, 여기도 있네.‘ 그러는 사이 또 한 번 곰은 텐트 안으로 쿵 하고 돌진해서는, 제는 당신의 어깨를 노린다. 또다시 쿵 하는 소리, 쿵, 쿵, 쿵! 잠시침묵, 아주 긴 침묵. ‘기다려 봐! 맞아, 갔어. 곰이 다른 텐트나 숲으로 돌아간 것임에 틀림없어‘ 형언할 수 없는 안도감. ....… 정말 이런 상황은 피하고 싶다.
- P28
봉우리에 올라서면 지금까지 올라온 길은 훤히 보이지만 앞으로 뭐가 나올지 전혀 예측을 할 수 없다. 어느 쪽이든 나무 커튼 사이로 가파른 비탈길이손에 잡힐 듯 잡힐 듯하다가 다시 뒤로 물러서고, 그럴수록 몸의 기운은 쪽쪽 빠지고 얼마나 왔는지조차 감을 잃어버리게 된다. 꼭대기라고 생각한 곳까지 억지로 몸을 끌고 올라갈 때마다 그 너머에 또 다른 봉우리가 솟아올라 있다. 그것도 전혀 밑에서는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봉우리가 나타나고 그 비탈을 넘어서면 또 다른 비탈, 그 비탈을 넘어서면 또 다른 비탈, 각 비탈마다 새로운 비탈을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길게 반복해서, 끊임없이 비탈이 늘어서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질 때까지 비탈이 나타난다. 마침내 그 너머로 맑은 하늘밖에 보이지 않고 가장 높이 있는 나무들의 맨 위를 볼 수 있는 높이까지 올라가면 "바로 저기다." 하면서전의가 다시 살아나지만, 이내 잔인한 기만으로 끝난다. 교묘히 치고 빠지는 산 정상은 나아간 만큼 계속해서 후퇴한다. 그래서 전경을 볼 수 있을 만큼 시야가 열릴 때마다 가장 높이 있는 나무들이전과 다름없이 엄청나게 떨어져 있어서 결국은 가까이 가기가 어렵다는 걸 깨닫고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비틀거리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 밖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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