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 대한 한 연구에서 보면 가장 오래 살아남은 이들은 낙관주의자나 비관주의자가 아니라 비관적 현실주의자라고 합니다. 비관적 현실주의자란 어떤사람들일까요? 이들은 ‘곧 나갈 수 있을 거야‘라고 무작정 믿는사람들이 아닙니다. 나는 여기서 죽고 말 거야. 영원히 여기를떠나지 못할 거야‘라고 믿는 사람도 아닙니다. 여기서 나가기는 쉽지 않아. 어쩌면 적들이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도 있어. 나는 영원히 여기서 썩거나 아무도 모른 채 죽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때까지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면도부터 해야겠다. 수용소에서 누가 본다고 면도를 하냐고? 그럼 뭘 하지? 가만히 누워서 죽을 때를 기다리나?‘ 이런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먹을 물도 부족한 판에 면도를 하고 세수를 합니다. 개인위생을 챙기고 하루하루를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헛된 희망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허황된 자존심에 목숨을 걸지도 않습니다. - P390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의 대부분은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온 유산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오래 살아남은 데는 다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예술과 관련되었다는 겁니다. 글을 쓰고노래하고 춤을 추고 연극에 침여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 여기엔대부분 큰돈이 들지 않습니다. 성장률이 제로로 수렴하는 저성장 시대가 이미 도래했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툭하면 0퍼센트의 성장 혹은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이민자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그런 일을 겪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많이 벌고 많이 쓰고 많이 저장하는 삶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런 비관적 인식하에 지금 여기에서 어떤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지에 대해 개인적으로, 독자적으로, 개별적으로,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 P395
요컨대 사람들은 그 어떤 엄혹한 환경에서도, 그 어떤 끔찍한 상황에서도, 그 어떤 절망의 순간에서도 글을 씁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글쓰기야말로 인간에게 남겨진 가장 마지막 자유 최후의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인간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도 글은 쓸 수 있습니다. 인간성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정신과 육체가 모두 파괴된 사람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글을 쓸 수 있는 한,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압제자들은 글을 쓰는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굴복을 거부하는 자들이니까요. - P426
글은 한 글자씩 씁니다. 제 아무리 빠른 사람도 글자 열 개를 한꺼번에 뿌릴 수 없습니다. 한 글자씩 한 글자씩 써야 단어가 만들어지며 이 단어들이 모여 문장이 됩니다. 그렇게 한 문장한 문장이 차례대로 쌓여야 글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은 의외로 중요합니다.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는데요. 이렇게 써나가는 동안 우리에게는 변화가 생기고 이게 추적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숨겨진 트라우마나 어두운 감정은, 숨어 있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막상 커튼을 젖히면 의외로 별 볼일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한 글자 한 글자 언어화하는 동안 우리는 차분하고 냉정하게 그것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언어는 논리의 산물이어서 제아무리 복잡한 심경도 언어 고유의 논리에 따라, 즉 말이 되도록 적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좀 더 강해지고마음속의 어둠과 그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힘을 잃습니다. 이것이 바로 글쓰기가 가진 자기해방의 힘입니다. 우리 내면의 두려움과 편견, 나약함과 비겁과 맞서는 힘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 P428
『위대한 개츠비』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선인인지 악인인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웃긴 인물인지 불쌍한 인물인지 파악하기 힘들어요. 분명히 알 수 없는 윤리적 판단의 회색지대에 있는 인물들이죠. 밀란 쿤데라가 한 멋진 말이 있어요.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다". 돈키호테에 대해서 어떻게 도덕적판단을 할 수 있겠어요? 웃을 수 있을 뿐이죠. 엠마 보바리에대해서 "죽일 년 이렇게 얘기하면 바보가 되는 거예요. 엠마 보바리에게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음으로써 독자가 좀 더 높은수준으로 올라가게 되는 거죠. -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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