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주인공들은 항상 너무 늦은 순간에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곤 하지만, 독자는 독서를 통해 커다란 위험 없이 무지와 오만을 발견하곤 했다. 특히 고전이란, 이탈로 칼비노의 정의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것들을 준비해두고 있다. 읽지않았으면서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독자의 오만은 오이디푸스의 헛된 자신감을 닮았다. 그리고 그 자만심은 독서를 통해서 비로소 교정된다. 독서는 왜 하는가? 세상에는 많은 답이 나와 있다. 나 역시 여러 이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것이다. 나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며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우리가 고대로부터 매우 발전했다고 믿는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게 된다. - P219
동시에 소설도 우리를 통해 증식을 거듭한다. 그렇게 이야기와 인간이 하나가 되면서 이야기의 우주가 무한히 확장해간다. 한때 나는 인간이 이야기의 숙주라 생각했다. 이야기가 유전자처럼 인간을 탈것으로 삼아 다음 세대로 전승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세상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한 대부분을 이야기로부터 배웠고,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그런 인간은 과연 무엇일까? 그렇다. 인간이 바로 이야기다. - P247
그러므로 좋은 독서란 한 편의 소설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만들어놓은 정신의 미로에서 기분좋게 헤매는 경험이다. 아, 왠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어, 인물들은 생생하고, 사건들은 흥미롭고, 읽는 내내 정말 흥분되더군, 주인공은 지난밤 꿈에도 나왔어. 이것으로 충분하다. 어차피 우리가 알아낸 모든 것은 작가가 꾸며낸 허구에 불과하다. 그 모든 요소와 장치는 독자로 하여금 작가가 창조한 그 세계에서 멋진 경험을 할 수 있게 제공된 것이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소중하다. 그런 귀중한 시간을 들여 소설을 읽는다면 뭔가 얻는 것이 있어야 하지않겠는가?" 아마 플로베르라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 아까운 시간을 들여 고작 ‘바람피우면 죽는다‘ 같은 교훈이나 얻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시간의 낭비일 겁니다. 분명히 우리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뭔가를 얻는다. 그런데 그 뭔가를 남에게 설명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한 미로와 타인이 경험한 미로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화폐경제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교환이 불가능한 것들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버릇이있다. 그러나 정말 소중한 것은 교환이 불가능하다. - P277
소설은 우리에게 가해자의 내면을 보여주고자 한다. 뉴스에서는 피해자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고 "우리가 사를리 에브도/에릭 가너 / 이라크다"라고 외치면서 피해자와의 연대의식을 드러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반대로 소설은 우리가 라스콜니코프, 험버트 험버트, 히스클리프라고 말함으로써 독자의 내면에 자리잡은 독선을 해체한다. 이것은 가해자와 연대하자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를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독자들로 하여금 혹시 자기 안에도 이런 괴물이 있는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는 뜻일 것이다. 가해자의 내면이 어느 정도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한편 독자의 내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나쁜 인물의 이야기를 오래 읽어줄 사람은 없다. ‘복잡하게 좋은‘ 사람의 이야기는 그보다는 흥미롭겠지만 복잡하게 나쁜 사람의 이야기만은 못할 것이다. - P3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