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저는 죽어야 한다>를 보고 나오면서 떠올린 것은 오래전에 한 연극연출가와 나눈 대화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극 싫어하는 사람은 못 봤습니다. 보는 건 지루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자신이 직접 하는 거 지루해하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군인이든 학생이든 정신병원의 환자는 막상 연기에 들어가면 바로 몰입하거든요."
"사람마다 연극적 자아라는 게 따로 있는 건가요?"
내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인간에게 연극적 자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연극적 자아가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렸을 때 소꿉놀이를 생각해보세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아이들은 엄마, 아빠, 의사와 간호사를 연기합니다. 인간은 원래 연극적 본성을 타고납니다.
이 본성을 억누르면서 성인이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되려는 욕망, 다른 사람인 척하려는 욕망을 억누르면서 사회화가 되는 겁니다. 연극은 사람들 내면에 숨어 있는 이 오래된 욕망, 억압된 연극적 본성을 일깨웁니다. 그래서 연기하면 신이 나는 거예요."
- P116
폴 오스터가 영화와 소설을 각각 2차원과 3차원에 비유했던 아네트 인스도르프와의 인터뷰를 연상시킨다. 오스터는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문제가있다"고 말해 컬럼비아대학교 영화학과장인 인터뷰어를 도발한다. 무슨 문제가 있냐니까, 영화는 무엇보다도, 2차원‘이라고대답한다.
사람들은 영화를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벽에 비쳐지는 평범한 그림인 영화는 현실의 환영이지 실재하는 물건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이건 이미지의 문제가된다. 대개 처음에는 영화를 수동적으로 보게 된다. 그렇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이 되면 우리는 영화 속에 흠뻑 빠지고만다. 두 시간 동안 매혹당하고, 속임수에 넘어가고 즐거워하다가 극장 밖으로 걸어나오면 우리는 그동안 본 것을 거의 잊어버리고 만다. 소설은 전혀 다르다. 책을 읽을 때에는 단어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노력해야 하고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그런 다음 상상력이 활짝 열리면 그 때는 책 안의 세계가 우리들 자신의 인생인 듯 느끼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냄새를 맡고 물건들을 만져보고 복합적인 사고와 통찰력을 갖게되고 자신이 3차원의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 P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