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도리 아버지를 생각하노라니 점점 애절한 기분이 들어, 나는 서둘러 옥상 위 빨래를 거둬들이고 신주쿠로 나가 거리를 걸으며 시간을 죽이기로 했다. 혼잡한 일요일 거리는 나를 오히려 푸근하게 해 주었다. 나는 통근 열차처럼 불비는 기노쿠니야 서점에서 포크너의 「8월의 빛을 사서 음악을 크게 틀어 줄 것 같은 재즈 카페에 들어가 오넷 콜먼이니 버드 파월의 레코드를 들으면서 뜨겁고 짙고 맛없는 커피를 마시며 방금 산 책을 읽었다. 5시 반이 되어 나는 책을덮고 바깥으로 나와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불현듯 앞으로 이런 일요일을 도대체 몇십 번 몇백 번 반복해야 하느냐는생각이 들었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고독한 일요일."이라고 나는 입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일요일에 나는 태엽을 감지않는다.
- P392

"그러니까 말이야, 가끔 세상을 둘러보다가 넌덜머리가나. 왜 이 인간들은 노력이란 걸 하지 않는 거야, 노력도 않고 불평만 늘어놓을까 하고."
나는 어이가 없어 그저 나가사와를 쳐다보았다. "내 눈에는 세상 사람들이 정말 몸이 부서져라 노력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내가 뭘 잘 못 본 겁니까?"
"그건 노력이 아니라 그냥 노동이야." 나가사와는 간단히 정리해 버렸다. "내가 말하는 노력은 그런 게 아냐. 노력이란건 보다 주체적으로 목적 의식을 가지고 행하는 거야."
"이를테면 취직이 결정되어 다들 마음을 푹 놓을 때 스페인어를 시작하는 그런 거 말이죠?"
"바로 그런 거지. 나는 봄까지 스페인어를 완전히 마스터할 거야. 영어와 독일어와 프랑스어는 벌써 했고, 이탈리아어도 대충은 돼. 이런 게 노력 없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는 담배를 피우고 나는 미도리 아버지를 생각했다. 미도리 아버지는 텔레비전으로 스페인어를 배우자는 생각은 아예 해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노력과 노동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런 걸 생각하기에는 너무 바빴다. 일도 바빴고 집 나간 딸을 데리러 후쿠시마까지 가야 할 때도 있었다.
"식사 말이야, 이번 토요일 어때?"
좋아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 P399

그게 무엇인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십이삼 년이 지난뒤였다. 나는 어떤 화가를 인터뷰하기 위해 뉴멕시코 주 산타페에 갔고 저녁에 근처 피자 하우스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고 피자를 씹으며 기적처럼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내 손이며 접시며 테이블이며 눈이 닿는 모든 것이 빨갛게 물들었다. 마치 특수한과즙을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쓴 것처럼 새빨겠다. 그 압도적인 저녁노을 속에서 나는 문득 하쓰미 씨를 떠올렸다. 바로그 순간 그녀에게서 비롯한 떨림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했다. 그것은 충족되지 못한, 앞으로도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소년 시절의 동경 같은 것이었다. 나는 가슴을 델 것 같은 무구한 동경을 이미 오래전에 어딘가에 내려놓았기에, 그런게 내 속에 존재했다는 것조차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하쓰미 씨는 내 속에 오랫동안 잠들었던 ‘나의 일부‘를 뒤흔들어깨워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거의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슬픔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너무도 너무도 특별한 여자였다. 누군가 어떻게든 그녀를 구원했어야만 했다.
- P415

"네가 정말로 좋아, 미도리."
"얼마나 좋아?"
"봄날의 곰만큼 좋아."
"봄날의 곰?" 미도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뭔데, 봄날의 곰이?"
"네가 봄날 들판을 혼자서 걸어가는데, 저편에서 벨벳 같은 털을 가진 눈이 부리부리한 귀여운 새끼 곰이 다가와 그리고 네게 이렇게 말해, ‘오늘은, 아가씨, 나랑 같이 뒹굴지 않을래요?‘ 그리고 너랑 새끼 곰은 서로를 끌어안고 토끼풀이 무성한 언덕 비탈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하루 종일 놀아. 그런 거, 멋지잖아?"
"정말로 멋져."
"그 정도로 네가 좋아."
- P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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