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낳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자녀 양육과 공공 봉사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반란‘ 동안 종군하기 위해서는 요하네스버그의 내 살림을 걷어치울 수밖에 없었다. 종군한지 불과 한 달 만에 그렇게 공들여 꾸며놓았던 내 집을 내놓지 않으면안 되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피닉스(Phoenix)에 데려다두고, 나는 나탈 군대 소속 인도인 환자수송대의 지휘를 맡았다. 당시 벗어날 수 없는 행군을 하는 도중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이런 식으로 공동체에 대한 봉사에 내 몸을 바치려면 자녀와 재산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바나프라스다. 즉 가사에서 물러난 자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 P293

그러나 나는 몇 가지 쓰라린 경험을 했다. 단체의 권리를 주장할 때는 그 힘을 빌리기가 쉬우나, 단체의 의무를 다하도록 할 때는 그 힘을빌리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데서는 모욕도 받았고, 어떤 데서는 묵살을 당하기도 했다. 민중들에게서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깨끗하게 하려고 마음먹게 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요. 그 일을 위해 돈을 내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전의어느 때보다도 더 잘 알게 된 것은, 민중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하게 하려면 무한한 인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혁을 하자고 애쓰는것은 개혁가지, 사회가 아니다. 개혁가는 사회에 대해서 반대와 증오와 목숨까지라도 빼앗을 박해 이상의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개혁가가 생명처럼 중히 여기는 것을 사회가 퇴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 P3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