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예술을 거부하겠다는 생각입니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형성된) 1950~60년대 서구 예술에 뭔가 문제가 있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예술 창조‘를 꿈꾸며 의기투합한 것이죠. 그렇다면 그들이 생각한 그 당시 서구 예술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마키우나스가 쓴 플럭서스 선언문을 보면 알 수있습니다.

"지적이고 전문적이며 삼업화한 문화와 부르주아의 병든 세계를 추방하라 죽은 예술, 모, 인공적인 예술, 추상적인 예술의 세계를 제거하라. 살아 있는 예술, 반예술을 진전시켜라, 평론가, 예술매효가, 전문가만이 마니라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현실 개념을 증진시켜라." 

글쓴이의 분노가 느껴지는 과격한 선언문, 전문화가 옳다고 여기며예술을 미술, 음악, 문학, 영화, 연극, 무용 등으로 잘게 찢어놓은 현실을 비판합니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팽창하는 자본주의 논리 속에 예술마지 상품으로 전락해버린 현실을 비판합니다. (1910년 뒤샹이 레디메이드로 금을 내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50년이 지난 1960년대에도 이전히 ‘회화와 조각‘ 형태를 고수하는 미술의 현실을 비판합니다. 사람과삶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담기지 않은, 관객과의 소통을 고려하지 않는 회화와 조각 형태의 추상미술이 득세하는 현실을 비판합니다.
- P356

인류의 평화를 노래한 존 레논처럼,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로 인류평화를 염원하는 굿판을 벌입니다. 밥 먹듯 숨 쉬듯 매일 TV와 첨단 과학기술에 대해 파고들던 남준, 마침내 그는 가까운 미래에 TV가 ‘인류평화를 가능케 할 매개물‘이 될 것이라는 통찰에 도달합니다. 다시 말해,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질 미래의 TV는 시공을 초월해 전세계 모든 이의 자유로운 소통을 가능케 해,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높여, 결국 국가 · 인종 · 이념의 벽을 허물어 세계인을 하나로 만들것이라고 본 것이죠.
그렇다면, TV를 어떻게 양방향 소통이 가능한 매체로 만들 수 있을까? 남준은 1980년대에 떠오른 뜨거운 첨단기술, ‘통신‘에 주목합니다. 미래에 TV와 통신 기술이 만나 인류의 양방향 소통이 가능해지고, 결국 인류의 공존공영에 한 발 더 가깝게 다가갈 것이라 본 것입니다. 나아가 인류는 기술을 그렇게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 P371

우리는 내 밖에 있는 타인을 객체로 보고 내 마음대로 규정해 지배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오로지 내 생각만 옳고, 내 식대로 모든 것이 움직여야만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타인을 향해 무조건적 폭언·폭력을 가하지 않았는가? 자연을 객체로 보고 내마음대로 해도 괜찮은 것으로 치부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타인과 자연을 내 마음대로 지배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이제, 우리가 타자와조화롭게 공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내 관점으로 타자를 보는 고집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타자를 보는 노력을 시작해야 하지않을까? (나와 마찬가지로 ‘타자도 살아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 우환은 작품에 ‘돌‘을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오직 인간의 머리에서 짜내 만들어낸 것만 작품이고 가치 있는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한 상황인데. 그럼, 이 돌은 뭔가? 인간이 만들지않은 이 돌(타자)은 뭔가? 언제까지 타자를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할 생각인가?"
- P404

그 타자인 듯하면서도 아닌 듯한‘ 이우환, 김환기와의 만남, 대화,
관계 맺기, 그 속에서 1970년대 한국미술계에서는 ‘한국적, 동아시아적 정신세계를 회화에 반영하는 것‘을 화두로 하는 회화 경향이 탄생합니다. 박서보, 윤형근(김환기의 사위), 윤명로,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 등의 화가로 대표되는 단색화입니다. "색채 덩어리를 옷처럼 뒤집어쓰고 어둠을 깨운다. 육체의 고통은 그림의 운명이고, 사랑이다. 단색화는 통쾌한 해방감이다. 라고 하종현이 말하듯, 이들은 회화 재료가 가진 물질성을 탐구하고, 반복적 그리기 행위를 통한 동양적 수행혹은 정신적 해방을 추구했죠. 다시 말해, 그들에게 그리기 과정은 물질 (물감, 붓, 캔버스, 종이 등)과 만나 논밭을 갈듯, 바느질하듯, 오체투지하듯 일정한 행위를 반복하는 수행 과정‘이었고, 그 과정 끝에 완성된그림은 그 수행 과정을 보여주는 ‘수행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 P409

이우환의 조각은 음악과 같다고?
이우환의 작품은 제작연도가 ‘1969/2013‘과 같이 쓰여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앞의 숫자는 최초로 작업한 해이고, 뒤의 숫자는 다시 작업한 해‘입니다.
이우환의 ‘조각‘은 ‘음악‘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음악은 작곡가가 악보를 하나 만들어놓으면, 이후 연주자가 언제든지 그 악보를 토대로 곡을 연주하게 됩니다. 그 결과, (악보는 같지만) 그것이 연주되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곡은 달라집니다. 우환의 조각도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환이 <관계항> 이라는 하나의 작품을 기획해놓으면, 이후 퍼포머가 실행하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항상 새롭게 창조됩니다. 다시 말해, 곡이 연주되는 시공간에 따라 곡이 달라지듯, <관계항> 이 시행되는 시공간에 따라 조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같은 콘셉트라도 누가, 무엇으로, 언제, 어디서‘ 행위하는지에 따라 무한하게 달라진다는 그 엄연한 진실을 자신의 조각 작업에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모노파의 예술관입니다.) 이것은 조각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간성과 장소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진정 조각의 본질에 다가가고 있는 조각가라 볼 수 있습니다. 이우환 이전의 조각을 떠올려보세요, 조각이 놓이는 시공간과 관계없이 이미 조각은 완성되어 있있습니다. 조각과 관계 맺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타자를 무시한 것이죠. 이우환은 관계항을 작업할 때마다 새로운돌을 찾아, 새로운 시공간과 함께 대화를 나눕니다. 행해지는 순간마다 새롭게태어나는 ‘살아 있는 조각‘인 것입니다. 매 순간이 새로운 것이며 살아 있다는것의 의미, 느끼지시나요?
- P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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