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해변을 도시 안에 만들면 어떨까? 2003년부터 지금까지 파리는 가마솥 같은 여름에 지진 사람들이 더위를 식히고 편히 쉴 수 있도록 도시 해변을 조성해왔다. 센 강 옆의 조르주 퐁피두Georges Pompidou 고속도로는 여름 몇 달 동안 차량 통행이 차단되고, 그 빈자리를 모래와 야자수, 해먹과 일광욕객에게 내어준다. 파리 플라주Paris Plage("파리 해변‘이라는 뜻 옮긴이)는, 사회주의 성향의 시장이 파리시민들, 특히 휴일을 즐길 여유가 없고 황량한 주변부에 틀어박혀 지내는 파리 시민들이 ‘공공 공간을 점유하고 기존과 다른 도시 생활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려고 고안한 것이었다. 파리 플라주를 설치한 것은 정치적 행위였다. 당시의 파리 시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리플라주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서로 뒤섞이는, 멋진 단골 장소가 될 것이다. 파리 플라주는 이 도시의 철학이자 공유와 형제애를 위한 시적공간이다."
- P172

도시는 연약한 존재다. 지속적인 투자와 재건 활동과 시민의식이없으면 도시는 정말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성직자 길다스가 브리타니아의 폐허에서on the Ruin of Britain)에 남긴 기록에 따르면 서기2007년에 로마군이 철수한 직후 총 28개의 로마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미 당시 그 28개의 도시들은 2세기에 걸친 점진적 탈도시화로 인해 껍데기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론디니움은 서기 5세기 말엽에 완전히 버림받은 도시로 전락했다. 그로부터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룬덴위크(lundeavi 라는 색슨족의 촌락이 유령 도시인 론디니움에서 서쪽으로 1.6킬로미터 떨어진 곳, 즉 오늘날의 코번트 가든 Coventandin에 해당하는 지역에 들어섰다.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서 로마도시들은 대규모 촌락 정도의 크기로 축소되었다. 한때 인구 10만 명을 자랑하는 속주의 수도였던 트리어는 대성당 주변에 모인 몇 개의촌락으로 쪼개졌고, 심지어 1300년경에도 인구가 8,000명에 불과했다. 아우구스투스가 갈리아에 세운 도시 오텀 Autum은 10제곱킬로미터넓이의 땅에 수만 명이 모여 살던 도시에서 면적 0.1제곱킬로미터의 촌락으로 쪼그라들었다. 님Nime과 아를 Arle 에서는 사람들이 원형 극장의 커다란 방어벽 안으로 피했고, 거기서 도회지가 형성되었다. 도시는 이제 약탈자와 습격자들이 군침을 흘리는 먹잇감이었다. 도로는교역의 길이 아니라 침입의 길로 바뀌었다. 그리스와 발칸 반도, 이탈리아에서는 사람들이 평지의 도로변에 있는 도시들을 버리고 방어에유리한 언덕 꼭대기의 촌락, 흡사 로마 시대 이전 그들의 조상들이 살았던 곳과 비슷한 곳으로 향했다. 한편 북유럽에서는 토목공사를 하고 통나무집을 갖춘 오피둠이 다시 생겼다.
석조 공사는 중단되었다. 문맹률이 치솟았다. 그린란드 만년설의 오염도를 측정한 결과에 의하면 이 무렵의 금속 가공량은 선사시대수준으로 하락했다. 원거리 교역으로 먹고살기 힘들어지자 큰 도시들은 경제적 능력을 상실했다. 권력과 재력이 도시에서 수도원과 장원 (봉건사회의 경제적 단위를 이루는 영주의 토지 옮긴이), 성채로 옮겨갔다. 적어도 향후 1,300년 동안 유럽은 기반시설, 기술체계, 위생처리, 수도 시설, 인구, 시민문화, 생활 수준, 고상함 등의 측면에서 로마 제국의 도시화 수준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1800년까지 인구 100만 명을 넘긴 도시가 없었다. 도시적 세련미의 표상인 목욕탕은한번 자취를 감춘 후 1829년에 리버풀의 피어 헤드Pier Head 시립 욕장이 개장할 때까지 다시는 일반 대중을 위한 용도로 쓰이지 않았다.
- P191

목욕은 도시의 생명력을 가늠하는 기준이다.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목욕탕과 수로교의 유적은 도시성의 붕괴를 가리켰다. 이슬람권 대도시들과 아시아 전역의 도시들에서 살아남은 목욕탕은 만개한 도시 생활을 상징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부분이 예전처럼 다시보잘것없는 곳으로 전락하는 동안,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 대부분은 맹렬한 에너지와 도시화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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