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의 보충수업 기간, 학교에 들어서는 순간 신발장 냄새가 진했다. 짧은 방학은 무더위 속에 지나가 버렸고 보충이 시작되자 모두 우울한 얼굴이었지만 사복이 허용되었으므로 옷 입는 재미로 버티고들 있었다. 그러나 승권은 그마저도 전혀 흥미가 없는 편이었다. 연하늘색 핀 스트라이프 반셔츠에 면바지가 승권의 최선이었고, 승권이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오직 하나였다.
혜현.
- P15
안은영은 아까의 한문 선생을 보호하고 있던 거대한 에너지 장막에 감탄하고 있었다. 보건실에만 박혀 있다 보니, 가까운 데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누군가 그 신생님을 매우 사랑했던 사람이, 죽어서도 강력한 의지를 남긴 게 틀림없었다.
그런 보호를 받고 있는데 왜 다리를 다쳤지? 희한한 일이다.
친해지기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만약 사태가 심각해지면 도움을 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거의 걸어 다니는 행운의 부적이나 다름없었다. 탐났다. - P27
우연히 들었다. 윗집 아줌마가 미끄럼틀에서 떨어져 죽은아이 얘기를 하며 겁을 줄 때 그게 정현이란 걸 알았다. 그걸 알았을 때는 이미 학교에 들어간 참이었고, 가족들과 친구들이 세계의 단단한 부분을 밟고 살아간다면 자신은 발이 빠지는 가장자리를 걸어야 함을 슬슬 깨달아 가던 중이었다. 그리하여 완전히 아이처럼 보였던 정현이 점점 젤리처럼 보였다.
- P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