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무하가 도착했을 당시 파리는 많은 마차와 새로이 늘어나는 자동차들로 현재보다 더 심각한 교통 체증을 겪고 있었다. 이미 세계 예술의 중심지이자 관광 명소가 된 파리는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밤을 잊고 있었다. 폴리 베르제르, 카지노 드 파리, 코미디 프랑세즈에서는 화려한 레뷰와 춤이 있었고 밤의 서커스와 물랭루즈가 있던 피갈 광장 주변의 카바레와 바에서는 질탕한 유혹이 오가는 야한 여흥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파리 거리에 나붙은 외설적인 포스터들은 이러한 퇴폐적인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부르주아들이 화려한 도시에서 쾌락에 몸을 내맞기고 있는 동안 빈민가와 매음굴에서는 부랑자와 창녀, 가난한 예술가들이 불안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폴 베를렌 Paul Verlaine과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가 자주 드나들었다는 카페에서는 새로 지어지는 지하철역과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세워지는 에펠탑이 도시 경관에 미칠 영향에 대해 옥신각신하는 공방이 오갔으며, 여전히 유명한 예술가들과 앞으로 유명해질 예술가들이 열띤 토론과 각자의 고민에 골몰해 있었다. - P52
그리고 국제도시 파리에서 소수 민족인 슬라브인 예술가로서 그는 자신의 나라와 민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주의자들과의 지속적인 교류는 체코의 민속 미술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애정을 느끼게 해주었으며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눈 뜨게 해주었다. - P55
사라 베르나르가 르메르시에 인쇄소와의 불미스런 사건으로 인해 업자를 샹프누와(hampenois로 옮기게 되자 무하 역시 상프누와와 계약을 맺게 된다. 1896년 이후 무하는 샹프누와와 함께 일련의 장식 패널, 달력, 엽서 등을 선보이며 ‘무하 양식‘을 형성해나간다. 그 첫 번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황도12궁이다. 마치 눈의 여왕을 연상시키는 듯한 관을 쓴 여인의 섬세한 옆모습은사람들에게 신비한 파문을 일으킨다. 굽이치는 머리칼, 머리 뒤로륜을 이룬 12개의 별자리와 함께 그녀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뭔가 비밀스러운 말을 건넨다. 별자리를 살짝 가리며 수줍게 가지를 뻗은 월계수 잎사귀와 식물 줄기를 연상시키는 장식 무늬가 그림의 가장자리를 메우고 있다. - P86
이제 무하의 포스터는 거릴 메우고 그의 장식 패널은 값싼 목로주점의 먼지 낀 벽에서, 가난한 학생의 허름한 하숙방에서 혹은고급 주택의 응접실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의 포스터와장식 패널은 다시 비단 천에 그리고 엽서에, 작은 과자 상자, 도자기 접시에도 인쇄되었다. 그의 작품은 굳게 닫힌 미술관의 유리문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이 닿는 거기에, 눈이 머무르는 어느곳에나 있는 대중을 위한 예술이 되어가고 있었다. - P93
페르펙타 자전거의 포스터 속 여인은 자전거의 심벌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무하‘라는 화가의 세기말 이상적인 여인의 심벌이기도 했다. 무하가 그린 포스터 속의 상품을 구매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무하‘라는 브랜드를 소비하게 되는 것과 같았다. 현대의 우리는 특정 대중 스타의 이미지가 특정 상품 혹은 기업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데 익숙해져 있지만 무하가 살던 시대에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다. - P121
이제 역사적 사건을 사실적인 묘사로 전달하기보다 그림이 가진 분위기와 뉘앙스를 통해 사실이 지닌 본질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무하에게 역사는 흥미로운 주제였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일에 그는 평생 큰 애정을 쏟는다. 역사를 소재로한 삽화들이 무하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필생의 과업으로 여긴 슬라브 서사시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슬라브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담아낸 이 연작에 무하는 자신의 민족과 조국에대한 자긍심은 물론이요, 범슬라브인에 대한 애정을 녹여낸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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