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 남극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싶었다. GPS 포인트로 찍히는 위도와 경도는 단지 숫자에 불과했다. 해가무척이나 길거나 또는 짧은 것을 느끼기까지 걸리는 기간이 너무 길었다. 그래서생각해 낸 것이 해시계, 사실 이곳에 와서 동서남북 방위를 일상적으로 느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분명 해는 동쪽에서 띠서 북쪽을 정중자오선을 지난 후에 서쪽으로 졌다. 미리 나침반을 준비해 와서 늘 확인하고 확인했지만 몸에 밸정도는 아니였다. 한낮에 해가 북쪽으로 떴지만 북쪽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북반구에 익숙한 우리는 북쪽 하면 뭔가 암울하고 춥고 어두운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또 남쪽하면 따뜻한 남쪽나라, 명랑하고 밝은 이미지다. 평생을 알게 모르게 몸에 밴 이 느낌이 단지 해가 북쪽에 있다는 이유로 쉽게 바뀌지는 않았다. 얼떨결에 말을 하다 보면 해가 있기 때문에 북쪽을 남쪽이라고 했고, 은연중 뭔가 이상하고 혼란스러웠다. 더구나 해가 길 때는 동쪽이라 하기도 뭐한 남쪽에가까운 기지 맨 뒤편에서 떴다가 서쪽으로 진다. 서쪽도 아니다. 남쪽이다. 남남서보다 좀더 남쪽으로 졌던 해는 바다 뒤로 노을을 이룬다. 그런데 이 노을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남쪽으로 가면서 점점 검붉은 노을이 되는 가 싶더니 또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이동한다. 이쯤 되면 노을이 노을이 아니다. 좀 전에 해질녘 노을은 노을이지만 여명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다. 왜냐하면 조금 뒤에 다시 해가 뜨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바다 밑으로 떨어진 해는 노을을 남겼지만 이내 여명이란 이름으로 바뀌고 얼마 뒤 해가 뜬다. 해는 그저 바다 밑에서 잠시 몸을 식혔다 나올 뿐이다. 해가 뜨는 쪽이 동쪽, 해가 지는 쪽이 서쪽이란 상식을 몸으로 느끼기에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겨울은 또 어떤가. 반대다. 해는 북쪽에 가까운 동쪽에서 떠서 잠시 얼굴을 보이는 듯하다 북쪽 가까운 서쪽으로 진다. 아니다. 그냥 북에서 떠서 북으로 진다. - P72
반도를 완전히 돌아 포터 소만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 보인 광경, 아니, 저건또 뭐야. 우리 기지 쪽에 있는 만 안쪽같이 빙원이 바다로 흘러 빙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넓은 빙원 뒤로는 우뚝 솟은 삼각 봉우리가 있었다. 넓은 흰색의 얼음위에 고깔 모양으로 우뚝 솟아올라온 검은 바위산, 그 둘레는 빙하가 이 산에 부딪혀 돌아간 듯이 움푹 파여 있었다. 물론 그 속 깊이까지는 모르지만 겉으로는그렇게 보였다. 누구라도 이 광경을 봤다면 너무나 신기하고 너무나 감탄스러웠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지형은 남극에서는 흔한 지형이었다. 과거 화산지대였던 곳이 빙하에 덮이면서 깎이고 깎여 나가는데 화산 자체는 우뚝 솟았기에 마지막에는 저런 형태로 남는다고 한다. 이런 지형을 누나탁(Nunatak)이라고 한다. 빙원 저 너머로는 많이 널려 있다고 했다. - P77
멀리서 은은하게 쾅…,이번에는 저쪽에서 쾅…. 빙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처음에는 너무 놀랐는데, 이 소리는 오히려 갑갑했던 고요함을 멀리 떨쳐 버리게 했다. 수천년 동안 쌓여 있었던 빙하가 소멸되는 소리였다. 수천년 전에 내렸던 눈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기도 했다. 만일, 한 번만이라도 한데서 밤을새워 본 일이 있는 분이라면, 인간이 모두 잠든 깊은 밤중에는, 또 다른 신비로운 세계가 고독과 적막 속에 눈을 뜬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알퐁스 도데의 「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인용을 해서 진부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만큼 잘 묘사를 해서가 아닐까. - P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