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충하는 두 가지 욕구 사이에 절묘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앞에 차려진 모든 가설들을 지극히 회의적으로 면밀히 검토하는 것과 아울러, 새로운 생각에도 크게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여러분이회의에만 머문다면, 여러분은 어떤 새로운 생각도 보듬지 못하게 됩니다. 새로운것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비상식이 지배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괴팍한 노인네가 될 것입니다. (당연히 여러분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데이터는 많이 있겠지요.)
다른 한편으로, 귀가 가볍다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마음을 열면, 그리고 회의적인 감각을 터럭만큼도 갖추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가치 있는 생각과 가치 없는생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모든 생각들이 똑같이 타당하다면 여러분은길을 잃고 말 것입니다. 결국 어떤 생각도 타당성을 갖지 못할 것이겠기에 말입니다.
칼 세이건 "회의주의가 짊어진 부담" , 패서디나 강연, 1987.
- P7

회의의 필요성은 차치하고, 회의주의가 혹평을 받는 까닭은, 부정하는 방법을 써서 잘못된 주장을 제거해 버리기만 한다는 인상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책이 그 점을 아주 훌륭하게 보여 줄것이다. 적절한 폭로는 모든 것을 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신하는 설명 모델을 찾기 위한 것이다. 그 대체 모델이 바로 훌륭한 도덕성과 결부된 이성적 합리성이다. 이 두 가지는 세상에 이제껏 알려졌던 선善을 실현할 가장 막강한 도구가 되어 줄 짝이다.
- 스티븐 제이 굴드의 서문 - P15

현실이 견딜수 없게 압박해 오면, 우리는 쉽게 미혹되어, 점술가와 손금쟁이, 점성술사와 심령술사에게서 확신을 보장받으려 한다. 삶의 크나큰 불안들을 완화한답시고 던져진 약속과 희망의 말들이 맹습을 해 오면,
우리가 가진 비판 능력은 무너지고 만다. 우리가 죽어도 진짜 죽는게 아니라면, 굉장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떠나보낸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근사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다.
회의주의자들 역시 그런 욕망에 사로잡힌다는 점에서, 믿는 자들과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이는 인간의 오래된 욕구에 해당한다. 다음 끼니를 장담 못할 만큼 삶이란 게 불확실했던 세상을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사후 세계와 영적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개발했다. 그래서 우리가마음이 약해지거나 두려움에 빠지면, 사후 세계에 대한 약속을 받는것만으로 증거가 지극히 보잘것없는데도 희망을 얻을 수 있다. 나머지는 모두 미혹되기 쉬운 인간성의 몫이다.  - P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