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녘이 되면 하늘은 심술궂은 아이처럼 붉은 기운을 단숨에 걷어가버렸다. 사방 어디에도 산이 없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유카탄의 석양은 느지막이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가 일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평생 지평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조선인들에게 이벌판의 황막함은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산과 산 사이에서 태어나 산을 바라보고 자랐으며 산등성이로 지는 해를 보고 잠자리에 들었음을 깨달았다. 넘어갈 아리랑고개가 없는 끝없는 평원은 그야말로 낯선 풍경이어서 사람들은 딱히 바닥이 딱딱해서라기보다 지평선이 주는 막막함과 공허로 뒤척였다. - P109
이종도는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글을 쓸 줄 모르는 자들이 눈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편지를 쓰시는 게지요? 방해하지 않을 테니 어서 편지를 쓰십시오. 우리는 다만 기다릴 뿐입니다. 폐하께, 그리고 정부에 우리의 이 실상을 알려주시오. 돈도 밭도 필요 없으니 제발 우리를 데려가달라고, 그리고 그 편지를 다 쓰시거든, 일가친척 피붙이께도 다 쓰시거든, 우리 것도 한 번만 써주시오. 무사하지는 않으나 잘 있다고,
내 형제, 내 가족에게 전해주시오. 그들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있었다. 그것은 황족이자 사대부인 이종도에겐 새삼 충격이었다.
서울에선 단 한 번도 자신을 향한 이런 애절한 눈빛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 P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