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부터 남부는 제도의 변화 덕분에 한층 더 빠른 성장이 가능한 체질로 개선되기 시작했다. 이내 미국 남부에서 완전히 뿌리가 뽑힌착취적 제도는 독립 이전 보츠와나의 식민지제도와는 그 형태가 달랐다. 그런 제도의 몰락을 초래한 결정적 분기점 역시 형태가 달랐지만,
공통점도 적지 않았다. 1940년대부터 남부에서 차별정책과 착취적 제도에 시달렸던 로자 파크스 같은 사람들이 훨씬 더 짜임새 있는 저항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미국 대법원과 연방 정부도 남부의 착취적 제도 개혁에 체계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남부의 변화를 초래한 결정적 분기점의 핵심 요소는 남부에 사는 흑인이 힘을 키우고 남부 엘리트층이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던 시절이 막을 내렸다는 사실이었다.
- P585

1976년 9월에 결정적 분기점이 마련된다. 마오쩌둥이 숨을 거둔 것이다. 그때까지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의 손아귀에 있었고,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역시 대체로 그가 주도한 일이었다. 그런 마오쩌둥이사라지자 이번에는 본격적인 권력 공백이 생겼고 변화에 대해 다른 생각과 신념을 지닌 이들 사이에 권력 암투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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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중국 인민은 시급히 삶의 질을 높여줄 필요가 있었고, 마오쩌둥 정권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공산당에 맞설 만한 실질적인 반대 세력은 모조리 뿌리 뽑힌 뒤였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문화대혁명뿐 아니라 마오쩌등의 다른 제도적 유산도 대부분 부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들도 결국 포용적 경제제도를 향해 성큼 다가가지 않는 한 경제성장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따라서 경제를 개혁하고 시장의 힘 및 인센티브의 역할을장려하고자 했다. 사유재산의 범위를 확대하고, 사회 및 행정에서 공산당의 역할을 축소하고, 계급투쟁 등의 개념을 척결하길 원했다. 덩샤오핑 진영은 해외 투자와 국제무역에도 개방적이었고 세계경제에 중국을통합하는 한층 더 적극적인 정책을 추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포용적인 제도를 구축하고 경제에 대한공산당의 장악력을 크게 축소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 P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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