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결과 시에라리온, 에티오피아, 콩고는 악순환을 벗어나기가 한층 더 어려웠고, 포용적 제도를 향한 행보 역시 한 걸음을 떼어놓기조차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정권을 장악하려는 이들을 견제할 만한 전통적, 역사적 제도도 전무했다. 일부 아프리카 지역에 그런 제도가 존재하기도했고 보츠와나에서처럼 식민 지배 시절을 견뎌내고 끝까지 살아남은 예외적인 사례도 없지 않다. 하지만 시에라리온의 역사를 통틀어 그런제도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고, 존재한다 해도 간접 통치 때문에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케냐와 나이지리아 등 아프리카의 다른 영국 식민지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절대왕정 시절의 에티오피아에서는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콩고에서는 벨기에의 식민통치에 이어 모부투의 전제적 정책 때문에 토착제도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이 중 어떤 사회에서도 새로운 정권을 지지하고 사유재산권 안정 및 기존 착취적 제도의 종식을 요구할 만한 신흥 상인, 사업가, 기업인이 등장하지 않았다. 사실 식민통치 시절착취적 경제제도가 횡행했다는 것은 기업가 정신이나 사업의 기회가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는 뜻이었다.
- P515

포용적 제도를 향한 거대한 행보가 시작된 명예혁명이나 메이지유신에서 발견되는 핵심적인 요인은 절대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고 절대주의적 제도를 포용적이고 다원적인 제도로 갈아치우겠다는 각오를 한 광범위한 연합이 힘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광범위한 연합이 혁명을 일으키면 그만큼 다원주의적인 정치제도가 태동할 가능성도 커지게 된다. 시에라리온과 에티오피아에서 과두제의 철칙이 적용될 가능성이 높았던 이유는 기존의 제도가 극도로 착취적이었을 뿐 아니라, 시에라리온의 독립운동이나 에티오피아의 더그 쿠데타가 그런 광범위한 연합의 혁명이 아니라 착취의 고삐를 자신들이 쥐고자 안달했던 개인 및 집단의 권력 찬탈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 P519

 1991년에서 2001년까지 10년 동안 피 튀기는 내전을 겪으면서 시에라리온은 전형적인 정부 실패 사례가 되었다. 우선 다른 여러 나라처럼착취적 제도에 신음하는 나라로 출발했다. 물론 유난히 사악하고 비효율적인 형태의 착취적 제도였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국가가 실패하는 이유는 지리적 원인이나 문화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국가를 장악한 소수의 손에 부와 권력을 쥐여주어 불안정과 갈등, 심지어 내전까지 일으키는 착취적 제도의 유산 때문이다. 착취적 제도는 또한 가장 기본적인 공공서비스 부문에 대한 투자마저 무시하기 때문에 점진적인 정부의 실패를 가져온다. 시에라리온에서도 바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 P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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