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가 내린 유명한 정부의 정의는 널리 통설로 받아들여진다.
베버는 사회에서 "합법적인 폭력 사용을 독점monopoly of legitimate violence"하는 것이 곧 정부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합법적 폭력의 독점과 그에 따른 일정 수준의 중앙집권화가 없다면 정부는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고경제활동을 규제하는 것은 물론 법질서를 강제할 수도 없다. 정부가 중앙집권화에 실패하면 그 사회는 소말리아처럼 곧 혼란에 빠지고 만다.
우리는 충분히 중앙집권화되고 다원적인 정치제도를 포용적 정치제도(inclusive political institutions) 라고 부를 것이다. 두 조건 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한다면 착취적 정치제도(extractive political institution)라 할 만하다. - P126

착취적 정치제도하에서 가능한 두 번째 성장 유형은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그런 제도가 어느 정도 포용적 경제제도의 발달을 허용하는 상황에서 목격된다. 착취적 정치제도를 갖춘 사회라면 으레 창조적 파괴가 두려워 포용적 경제제도를 꺼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사회마다 엘리트층이 권력을 독점할 수 있는 정도가 다르기 마련이다. 엘리트층의 입지가 워낙 확고해 자신들의 정치권력이 위협받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한다면 어느 정도 포용적 경제제도를 수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는 역사적 상황 때문에 착취적 집권 세력이 얼마간 포용적 성향의 경제제도를 물려받게 되고, 어떤 이유에서든 그런 제도를 차단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럴 때가 착취적 정치제도하에서도 성장이 가능한 두 번째 경우라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국이 급속도로 산업화한 것이 그런 예다. 박정희는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당시 한국 사회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고 경제 또한 본질적으로 포용적이었다. 박정희정권이 권위주의적이라고는 해도 경제성장을 추진할 만큼 권력 기반에대한 확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대단히 적극적으로 경제성장을 추구했다. 아마도 그가 정권을 지탱하기 위해 반드시 착취적 경제제도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착취적 제도하에서 성장을 이룬 소련 등 다른 대부분 사례와 달리 한국은 1980년대 들어 착취적 정치제도 역시 포용적 정치제도로 변모한다.  - P141

정치제도가 착취적 성향에서 포용적 성향으로 바뀌지 않는 한 권력을 분배하고 행사할 능력은 언제든 경제적 번영의 기반을 훼손할 수 있다는 뜻이다.
- P145

(서유럽에서)흑사병으로 노동력이 급감하자 봉건질서의 기반이 흔들렸다. 소작농이 변화를 요구할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엔셤 수도원Fynsham Abbey에서는소작농이 벌금과 부역을 대폭 줄여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들은 실제로 그 뜻을 이루었고 새로운 계약을 맺었는데, 이런 기록이 덧붙여져 있다. "1349년 창궐한 페스트로 숨진 사망자가 많아 영지에는소작농이 고작 둘밖에 없었다. 이들은 당시 영주이자 수도원장이었던 업턴의 니컬러스 사제 Brother Nicholas of Upton 가 새로운 계약을 맺지 않는다.
면 떠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영주는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엔념 수도원의 사례는 곳곳에서 되풀이되었다. 소작농은 강제노역을 비롯해 영주에 예속됨으로써 져야 했던 온갖 부담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임금도 차츰 올랐다. 
.....
잉글랜드 엘리트층이 가장 염려한 것은 가뜩이나 귀한 소작농을 스카우트하려는 다른 영주들의 유혹이었다. 고용주의 허락 없이 고용을 파기하면 징역형에 처하는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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