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이른바 장차 올 후생이 과연 두려워할 만하다면, 뒤에송생과 같은 자가 또한 적지 않을 것인데 내가 또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비록 그러나 설령 송생으로 하여금 더 오래 살게 하여 그 사업을 채우게 하였더라도 세상은 송생의 어짊을 오늘날처럼 알아줌이 없을 것이다. 그럴진대 비록 송생으로 하여금 오히려 살아 있게 하였더라도 한낱 궁한 선비가 되는 데 지나지 않았을 따름일 터이니, 내가 비록 슬퍼하지 않고자 해도 그럴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 삶도 죽음도 모두 슬퍼할 만하여, 한결같이 슬프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어찌 송생을 위하여 슬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내가 송생을 슬퍼하는 것이 그 홀로 송생만을 슬퍼함이겠는가?
- 조찬한 <宋生傳> 중에서 - P165

내(茶山)가 황상에게 문사(文史) 공부할 것을 권했다. 그는 쭈뼛쭈뼛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제가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꼭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한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가 있다.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한 사람은 소홀한 것이 문제다. 둘째로 글 짓는 것이 날래면 글이 들떠 날리는 게 병통이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거친 것이 폐단이다. 대저 둔한데도 계속 천착(穿鑿)하는 사람은 구멍이 넓게 되고,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성대해진단다. 답답한데도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하게 된다. 천착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뚫는 것은 어찌 하나?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 네가 어떤 자세로 부지런히 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 P182

황상은 도중에 스승의 부고를 듣고, 그 길로 되돌아와 스승의 영전에 곡을하고 상복을 입은 채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845년 3월 15일 황상은 스승의 10주기를 맞아 다시 두릉을 찾았다. 다산의 아들 정학연(丁學淵)은 10년 만에 기별도 없이 불쑥 나타난 황상을 보고 신을 거꾸로 신고 마당으로 뛰어내려왔다. 황상은 이제 예순을 눈앞에 둔 늙은이였다. 꼬박 18일을 걸어와 스승의묘 앞에 섰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부르튼 발을 보고 학연은 아버지 제자의 손을 붙들고 감격해 울었다. 그의 손에는 그 옛날 스승이 주었던 부채가 들려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그립고 제자의 두터운 뜻이 고마워, 늙어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부채 위에 시를 써주었다. 그리고는 정씨와 황씨 두 집안간에 계를 맺어, 이제로부터 자손 대대로 오늘의 이 아름다운 만남을 기억할 것을 다짐했다. 그 정황계안(黃契案))은 황상의 문집에 실려 있다.  - P193

매탕(梅宮) 이덕무(李德愁)가 한 번은 처마 사이에서 늙은 거미가 거미줄 치는 것을 보다가 기뻐하며 내게 말하였다.
"묘하구나! 때로 머뭇머뭇할 때는 생각에 잠긴 것만 같고, 잽싸게 빨리 움직일 때는 득의함이 있는 듯하다. 발뒤꿈치로 질끈밟아 보리 모종하는 것도 같고, 거문고 줄을 고르는 손가락 같기도 하구나."
- 박지원 <夏夜연記>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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