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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그 시를 여기에 옮겨적지는 않는다. 모두에게 알려지기 전까지는
나만의 시이므로. 아니 모두가 안다고 해도
나만의 것이다." 

 

Well, son, I'll tell you:
Life for me ain't been no crystal stair.
It's had tacks in it,
And splinters,
And boards torn up,
And places with no carpet on the floor --
Bare.
But all the time
I'se been a-climbin' on,
And reachin' landin's,
And turnin' corners,
And sometimes goin' in the dark.
Where there ain't been no light.
So boy, don't you turn back.
Don't you set down on the steps
'Cause you finds it's kinder hard.
Don't you fall now --
For I'se still goin', honey,
I'se still climbin',
And life for me ain't been no crystal stair.

아들아, 난 너에게 말하고 싶다.
인생은 내게 수정으로 된 계단이 아니었다는 걸.
계단에는 못도 떨어져 있었고
가시도 있었다.
그리고 판자에는 구멍이 났지.
바닥엔 양탄자도 깔려 있지 않았다.
맨 바닥이었어.
그러나 난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계단을 올라왔다.
층계참에도 도달하고
모퉁이도 돌고
때로는 전깃불도 없는 캄캄한 곳까지 올라갔지.
그러니 아들아, 너도 돌아서지 말아라.
계단 위에 주저앉지 말아라.
왜냐하면 넌 지금
약간 힘든 것일 뿐이니까.
너도 곧 그걸 알게 될 테니까.
지금 주저앉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얘야, 나도 아직
그 계단을 올라가고 있으니까.
난 아직도 오르고 있다.
그리고 인생은 내게
수정으로 된 계단이 아니었지.

 

 

아~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아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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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nmot 2006-02-14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랭스턴 휴즈의 시 '조언'을 알려주신 브릿(ykikibeach)님께 감사드립니다!
 
 전출처 : 로쟈 >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지난번에 신간 러시아 판타지 소설 <나이트 워치>를 소개하면서 러시아 입문서 두 권에 대해서도 덧붙인바 있는데, 그걸 조금 보완하고자 한다. 오늘자 한국일보의 '강정의 나쁜취향'에서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다루어지기도 해서 대략 '분위기'도 좋은 걸로 간주하고 말이다. 물론 우호적인 분위기만 형성돼 있는 건 아니다. 며칠전 뉴스에서는 극동러시아에서 가짜 술을 마시고 주민 19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타전됐으니까.

 

인테르팍스통신에 따르면,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3일까지 마가단 시에서 가짜 술을 마신 주민 23명이 복통증세로 입원해 이가운데 19명이 사망했다. 말 그대로 독주(毒酒)를 제조하고 또 그걸 마신 것인데, 지역 내무국(우리의 경찰)은 '사마곤'이라는 가내 술을 제조해 판매한 지역 주민 4명을 검거했다고(대낮에 아직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나라가 러시아 말고 또 있을지 궁금하다). 해서,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웬만해야 말이지.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1866)는 사실 19세기 러시아의 표도르 이바노비치 츄체프(1803-1873)의 시구이다(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시도 제목이 없는 경우 대개 1행을 제목처럼 사용한다). 츄체프란 이름을 영어로 음역하면 'Tjutchev'가 되는데, 이에 대한 우리말 표기는 '튜체프', '츄체프', '쮸체프' 등 다양하다('쮸쳅'이라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귀족출신에다 외교관이었는데 시인으로 인정받은 것은 좀 나이가 들어서이다. 해서 '철지난 낭만주의' 경향의 철학적인 시들을 주로 썼다. 

 

하지만 문학사에서의 평가는 후한 편이어서 푸슈킨(1799-1837) 이후의 19세기 최대 시인으로 꼽힌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에 한몫한 이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이다. <츄체프와 도스토예프스키>란 연구서가 있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사실, 둘의 친연성은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선언적인 시에서도 유추해볼 수 있다(도스토예프스키 왈, "유럽은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지만 러시아는 유럽을 이해할 수 있다." 왜 아니겠어?).  

 

츄체프의 시들은 더러 우리말로 번역/소개돼 있지만 시집으론 <말로 표현한 사상을 거짓말이다>(새미, 2001)가 유일하다. 어차피 시란 (잘) 번역되지 않으므로 아쉽지만 유감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그 번역시집은 내가 안 갖고 있는데, 지금 인용하고자 하는 번역은 예일 리치먼드의 <러시아, 러시아인>(일조각, 2004), 107쪽에도 실려 있는 것이다.   

 

지성만으로는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네,

별난 기준이 그 광대함을 채우고 있기에;

러시아는 홀로 유일무이하게 서 있도다 -

러시아에서는 오로지 믿음뿐.

 

매우 유익한 러시아 입문서로서 내가 추천까지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시만큼은 부정확하게 번역되었다. 음역한 원문과 영역, 그리고 나의 번역을 차례로 나열하면 이렇다: 

 

Umom Rossiju ne ponjat',

Arshinom obshchim ne izmerit';

U nej osobennaja stat' -

V Rossiju mozhno tol'ko verit'.

 

One cannot understand Russia with the mind;

She cannot be measured with a common yardstick.

She has a special image.

One can only believe in Russia.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러시아는 보편적인 척도로 잴 수 없다.

러시아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으니

러시아를 우리는 단지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시 흉내를 내느라고 '러시아'란 두운을 맞추었는데, 내용은 간단하다. 러시아는 뭔가 특별하기 때문에 이성으론 이해할 수 없고 다만 믿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 그러니 "지성만으로는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네,/ 별난 기준이 그 광대함을 채우고 있기에;/ 러시아는 홀로 유일무이하게 서 있도다-/ 러시아에서는 오로지 믿음뿐."이란 번역(특히 2행)이 부분적으로 엉뚱하다는 건 알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시조차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   

 

 

 

 

어제 날짜 한겨레의 칼럼 '유레카'는 '영혼의 모독'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이렇게 시작된다: "'사형은 영혼의 모독이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다. 작가는 <백치>에서 토로한다. '선고문이 낭독되면 이젠 죽음이 기정사실화합니다. 바로 여기에 무서운 고통이 있습니다. 이보다 더 가혹한 고통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진다: "상상이 아니었다. 절절한 체험이다. 38살 때다.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논의하던 모임에 참여했다는 이유였다. 체포됐다.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대에 올랐다. 집행하던 순간이었다. 니콜라이 1세의 특사가 내렸다. 시베리아 유형에 처했다." 짧은 문장들로 아주 긴박했던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는데, 문제는 '38살 때' 아니라 '28살 때'라는 것('38살'은 필자의 착오 혹은 상상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생이고 그가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지는 것은 1849년의 일이다. 팩트에 좀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좋았겠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 혹은 '러시아 백치'는 들뢰즈 읽기에서도 종종 마주치게 된다. 들뢰즈의 철학극장, 혹은 철학의 경연장에서는 두 종류의 백치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데카르트적 백치'('방법론적 백치'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와 '러시아 백치'이다. 라이크만이 <들뢰즈 커넥션>(현실문화연구, 2005)에서 정리하고 있는 대목을 따라가본다: 

"데카르트의 경연에서는 '백치'라는 새로운 개념적 인물이 등장한다. 이 백치는 프랑스어 같은 이성적 언어를 선호하는 인물로, 프랑스어는 학술어인 라틴어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다. 들뢰즈는 이 인물이 독창적인 형상임을(비록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에 의해 예견된 것이라 할지라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인물과 그 빛은 동시에 코기토, 즉 '나는 생각한다'를 철학의 최초의 출발점, 즉 전제조건 없는 출발점으로 만들려는 데카르트의 시도 안에 있는 암묵적인 가정을 드러낸다. 이 가정은 데카르트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통념'이라는 가정을 말한다."(77쪽)

비문인가 싶어 다시 읽어보니 굵은 글씨로 내가 표시한 대목은 오역이다(아무래도 역자의 '영어'에 좀 문제가 있는 듯하다). 원문은 "an Idiot who prefers a rational language like French, which anyone can understand to learned Latin."(37쪽) 표시한 대로 'prefer A to B' 구문이고, 여기서는 A에 해당하는 것이 '프랑스어' 그리고 B에 해당하는 것이 '학문어로서의 라틴어'이다. 데카르트적 백치는 현학적인 라틴어 대신에 프랑스어 같이 합리적인 언어를 선택한다는 것.

반면에 '새로운 인물(new persona)'로서의 '러시아 백치'란 데카르트적 백치의 '암묵적인 가정' 마저도 벗어던진 백치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새로운 인물이 통념이라는 사유학적인 기본전제 없이도 해나갈 수 있도록 나타나게 되며, 대신에 러시아문학에서 백치 또는 배우지 않은 사유자라 불리는 인물 형태의 조건에 근접하게 된다."(78쪽) '백치 또는 배우지 않은 사유자'는 'Idiot or unlearned thinker'의 번역이다.

그러니까 러시아 백치는 데카르트적 백치를 더 극단에까지 밀어붙인 형상이라 할 만하다. 그는 프랑스어 같은 자연어의 규칙마저 기꺼이/즐겁게 포기하는 것이다(참고로, 러시아문학에서 가장 철저한 '데카르트적 백치'의 형상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톨스토이의 <참회록>(1882)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참회록>은 러시아적이기보다는 프랑스적이다. 톨스토이에게서 <참회록>은 새로운 삶을 위한 '방법서설'격의 작품이다).

 

 

 

 

그렇다면, "철학에서 우리는 데카르트의 백치보다는 러시아의 백치를 보는 데서 출발한다."(In philosophy, we start to see a Russian rather than a Cartesian Idiot.) 그 백치는 "프랑스어와 같은 '자연어'에서조차도 개념적으로 낯선 어떤 것을 찾기 시작한다." 이때 들뢰즈가 예시하는 사례는 "폴란드어로 글을 쓰거나 철학적인 독일어를 '춤'으로 만들려는 니체의 꿈"이다. 그리고 (들뢰즈가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라이크만이 들고 있는 사례는 "늘 공적인 교수직과 새로운 분석철학의 '스콜라주의'의 도래에 대해 안절부절" 못했던 비트겐슈타인이다. 거기에 내가 들고 싶은 사례는 실제로 춤을 추었던 러시아의 무용수 니진스키이다(그의 일기 <영혼의 절규>를 보라. 러시아어 원제는 <감정>). 그리고 영화의 용도를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든 타르코프스키. 하면, 니체도 비트겐슈타인도 니진스키도 타르코프스키도 모두가 백치였던 것. 러시아 백치.

다시 들뢰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실제로 철학에서 '전제들 없이 시작하는' 유일한 길은 일종의 러시아 백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통념이라는 가설을 포기하고, 자신의 '해석 나침반'을 던져 버리고, 그 대신 자신의 '백치짓'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특이한' 스타일로 바꾸고자 노력하는 그런 백치가."(79쪽) 그런 러시아 백치는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러시아 백치가 보여주는 것은, 철학적 사유는 학습되는 것이 아니며, 뿐만 아니라 철학이 자유롭게 창조된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동의할 때나 규칙에 따라 놀이할 때가 아니라, 반대로 규칙이 무엇이며 놀이자가 누구인지가 미리 주어지지 않는 대신 (그것들이) 새롭게 창조되는 개념과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과 함께 등장할 때다."(79-80쪽) 그러니까 데카르트적 백치가 최소한의 규칙을 갖고서 출발한다면, 러시아 백치는 그마저도 빼먹고서 춤을 춘다. 이어지는 문장은 좀 길다.

"다시 말해 이런 백치들은, 처음에는 직관에 의해 주어지고 그 다음에는 많은 복합된 방식으로, 들뢰즈가 인용하기를 좋아한 라이프니츠의 격언, 즉 '우리는 항구에 닿았다고 생각할 때 사실은 여전히 바다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라는 격언이 암시하는 방식으로 다른 개념들과 얽히게 되는 개념들을 창조함으로써, 더이상 고정된 방법들이나 선행하는 형식들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조차 없으며 그 대신 자신의 특이한 문제들로 작업하는 데 만족하는 철학을 통해 '실천학적으로 가정'된 것을 극화하도록 돕는다."(80쪽)

이해를 돕기 위해서 줄거리는 굵은 글씨로 표시했는데, 다소 부정확한 대목이 있다. 굵은 글씨로 표기한 대목의 원문은 이렇다: "Such Idiots help dramatize, in other words, what is 'pragmatically supposed' by a philosophy that no longer even purports to be derived from fixed methods or prior forms, that is instead content to work out its pecular problems..."(38쪽) 

역자는 'content to'를 '-에 만족하는'으로 옮겼는데, 'content to-inf'는 ('willing to-inf'처럼) '기꺼이 -하다'란 뜻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백치들은 사전의 어떤 공식이나 방법 등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 고유한(그리고 아주 복잡한) 문제들을 풀기 위해 기꺼이 달려드는 것. 해서 이 백치들은 난생 처음 수박을 먹어보고(물론 '수박'이란 개념도 갖기 이전에), 난생 처음 헤엄을 쳐본 이들이다(물론 '수영'의 방법도 배우기 이전에). 아무도 가르쳐주기 전에.

 

 

 

 

그렇다면 이 백치와 유사한 형상, 혹은 인물은 <안티 오이디푸스>(와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에 나오는 손재주꾼(handyman)이겠다. 국역본 번역으론 "우리는 이것저것 긁어보아 잘 꾸려내는 자들이다." 불어로는 'bricoleurs'. '개념 없는 자들', 하지만, 개념 대신에 재주를 갖고 있는 자들. 그래서 아무런 개념도 없이 기꺼이 자르고 오려붙이고 해서 무얼 만들거나 아니면 결국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자들. 아이들. 백치들. 이쯤이면 들뢰즈가 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그토록 경탄해마지 않는지 이해할 만하다. 그에게, 혹은 진정한 경험론자에게 세계는 말 그대로 '원더랜드'인 것!  

 

 

 

 

'앨리스'의 러시아식 이름은 '아냐'이다. 그리고, '아니시야', '안토니나' '안나'가 다 같은 이름들이다. '안나 카레니나'. 이 대목에서 얼마전 장정일 선집의 한권으로 다시 나온 소설 <보트 하우스>(김영사, 2005)를 잠시 떠올려보는 것도 괜찮겠다(이전에 '모스크바통신'에서 한번 소개한 바 있다). IMF가 배경인 소설에서 주인공 애라가 다니는 노문과에는 그녀가 다니는 노문과에는 네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음악을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 영화를 좋아하는 타르코프스키. 문학을 좋아하는 도스토예프스키. 미술을 좋아하는 칸딘스키.”가 그들이었다. 이 “네 명의 ‘스키’는 단돈 5만원을 주고 산 폐차 직전의 차를 타고 4년 동안 함께 단짝이 되어” 어울려 다녔는데, “강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피를 빨아, 강남에 부르주아의 천국을 만든 거”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한 건을 계획한다.

“‘스키’들이 정한 곳은 압구정동에 있는 외제품 전문 백화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에 당도했을 때는 거리에는 차량과 인파가 붐볐고 백화점은 아직까지 영업중이었다. 유럽식 외관을 하고 있는 외제품 전문 백화점의 대리석 벽에 넷이 나란히 오줌을 누기 위해서는 유치장행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에코와 푸코 그리고 바흐친을 이리 저리 섞고 아전인수식으로 변조하여 장래의 문화평론가로 행세하게 될 노어노문학과의 네 ‘스키’들은 전혀 그런 대가를 치를 생각이 없었다. 길거리에 방뇨를 하는 것은 꺼림칙하지 않지만 파출소에 붙들려 들어가 경을 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맥주와 보드카까지 섞어 마신 ‘스키’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백화점 현관으로 걸어 들어가서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시원하게 오줌을 눈다. 그러면서 “너무나 자연스레, 생리적으로, 체제 친화적이 되었다.” 이들과 같이 차를 타고 동행하던 애라는 히스테리를 부리며 차에서 내려 인도로 뛰어가는데, 그런 “까닭을 이 멍청한 ‘스키’들은 조금도 알지 못했지만, 어떤 현상도 자신들이 분석하지 못할 게 없다고 믿는 이 시건방진 ‘스키’들은 그 가운데 한 명의 ‘스키’가 중얼거리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흠, 알 수가 없는 여자군. 안나 까레니나야.” 

05. 11. 08.

P.S. 들뢰즈의 '백치'는 영어로 Idiot(백치)로 옮겨지고 어떨 땐 fool(바보)로도 옮겨진다. (라이크만도 혼용하고 있는) 이 '백치'와 '바보'가 같은 것인지 구별되는 것인지 나는 아직 분간이 되지 않는다. 이전에 '바보를 포함하고 있는 세계'에서 헷갈렸던 이유이다. 어쨌거나 들뢰즈에 관한 페이퍼들이 몇 주째 밀려 있다. 머리속에서 웅성대는 말들을 얼른 쫓아내고 싶은데, 그간에 그럴 만한 시간을 내지 못했다. 오늘은 또 '백치들' 때문에 공치고. 하긴 이런 글에 공연히 시간을 축내며 '목숨 거는' 이유는 나 자신도 모를 일이다. 하긴 '로쟈'는 러시아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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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개척시대 아메리카인의 일상 - 라루스 일상사 시리즈
필리프 자캥 지음, 이세진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보다보니...(읽는다기 보다는) 자꾸 어린 시절 보았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초원의 집>의 로라가 뛰어 놀고, 사랑하며 아이에서 숙녀로 성장했던 그 메마른 땅이 그리워진다.

나이가 들고 점차 지식이 쌓이다보니 인디언의 사라진 문화와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그 황량하고 잔인한 시대에 대해 알아버렸지만... 그때야 마냥 드넓은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던 노라가 그렇게 부럽기만 했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들이 살았던, 내가 아는 서부는 <초원의 집> 로라가 가르쳐 주었던 따뜻함의 기억이 전부이다.


그래서 <초원의 집>에서 막 나온듯한 한 가족이 서 있는 모습에 이렇게 가슴이 설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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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01 0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yeanmot 2005-11-01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핫, 그러쿤요... 하도 오래되나서 기억이 가물가물 *^^::* 수정할게요!
 
 전출처 : 홍세화 > [씨네21]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소설

[씨네 21 No.419] 2003년 09월 09일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소설 - 한지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부터 나오키상 수상작들까지, 일본 소설 올 가이드


일본 소설이 좋은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읽는 데 부담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의 소설에는 어떠한 강박도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에 대해서, 민족에 대해서, 이념에 대해서 그리고 가족에 대해서. 일본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어 있지 않다. 오직 개인의 일상과 개인의 존재감만이 있을 뿐이다. 등장인물은 나와 너와 그리고 그 혹은 그녀가 전부다. 주인공들의 일상은 그들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다. 관계에 얽매이는 법도 없다. 치정 정도가 사람과 사람이 만나 가장 복잡하게 꼬인 관계라고나 할까. 그들의 소설은 만나다, 헤어지다, 살아가다 딱 그 정도의 관계 안에서만 고민하고 그 안에서 방황한다. 담백하다 싶게 개인적인 소설, 그게 바로 일본의 '사소설'이다. 그들은 오직 자기 자신의 무게에 대해서만 고민하는데 강박이 없는 존재의 무게는 가벼운 법이다. 읽는 마음도 가볍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들의 소설이 항상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볍고도 무거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가벼운 작가이자 동시에 무거운 작가다. 하루키의 소설은 크게 두 가지 스타일로 나뉜다. <상실의 시대>처럼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일상을 특유의 감성으로 디테일하게 쓴 소설이 있는가 하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처럼 세계의 구조와 인간 실존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조망한 소설이 있다. 전자는 가볍고, 후자는 다소 무겁다. 최근 출간한 <해변의 카프카>는 후자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가출한 15살 소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 소설은 단순하게 말하면 한 소년의 내면이 성장하는 과정이다. 주인공이 35살이 아니라 15살이다보니(하루키의 소설은 35살 남자가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35살 그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가끔 그게 궁금하다) 요리를 하고 연애를 하고 맥주를 마시는 일은 없지만, 음악을 듣고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여 해답을 찾는 방식은 여전하다. 게다가 의식과 무의식이 시공을 초월한 대립을 통해서 비로소 어떤 답을 찾아가는 다소 난해한 설정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변의 카프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루키 소설과 다소 다르다. 작가후기에서 그는 불후의 걸작을 쓰고 싶다고 했던가. 비틀스와 듀란듀란 대신 나쓰메 소세키와 고대 소설인 <겐지 이야기>와 그리스비극을 차용하고 있는 <해변의 카프카>는 한결 깊이있고 풍부해 보이기는 하지만 때문에 하루키 특유의 감수성은 오히려 빛이 바랜 느낌이다. '걸작'에 대한 부담을 덜어냈다면 훨씬 재미있는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문체는 감성적인 소설에 더 적합하다. 형이상학은 그에게 버거워 보인다.

또 다른 무라카미 류는 퇴폐적이고 감각적이며 관능적이고 폭력적인 소설을 즐겨 쓴다. 그에게 아쿠타가와상을 안긴 <한없이 투명한 블루>에서부터 그가 지속적으로 택하는 소재는 마약과 섹스와 폭력.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를 즐기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세계에 냉소적인 시선을 던진다. 이러한 경향은 신작 <너를 비틀어 나를 채운다>에서도 예외없다.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을 그대로 옮겨 그린 듯한 책표지가 말하듯 이 책은 SM에 빠져 있는 일곱명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에게 살해된 남자가 여자들의 기억을 찾아내어 그들이 사디즘에 빠진 원인을 말해주는데, 그 원인이란 게 일곱명 모두 유년 시절의 성적 학대라는 결론이 좀 씁쓸하다. 하기야 여성을 바라보는 무라카미의 시선은 획일적인 데가 있다. 그에게 있어 여성은 성적으로 착취하거나 착취당하는 존재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여성에 대한 무라카미의 입장은 비교적 최근작인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세계 미식가협회 회원이기도 한 무라카미 류가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세계의 요리 31개를 엽편소설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는 이 책에서 편마다 요리와 함께 여자가 등장한다. 그 여자들에 대한 묘사는 요리에 대한 그의 평가와 일치한다. 그에게 여자란 입맛 다시며 먹어치우는 요리에 불과할 뿐이다.

일탈에 관하여

무라카미 류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일탈에 대해 쓰는 시마다 마사히코는 다자이 오사무와 더불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일본 작가다. 무라카미 류의 일탈이 세계에 대한 나르시시즘이라면 시마다 마사히코는 무정부주의를 꿈꾸는 소설가다. 그에게 있어 관(觀)으로 말할 수 있는 모든 세계는 부정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는 체제와 이념을 거부한다. 틀 안에 갇히는 것을 싫어하고 규정에 반발한다. 심지어 그는 그 자신도 부정한다. 아니 조롱한다. 모든 이념과 집단의식이 그의 소설에서는 하나의 농담이자 유머가 되어버린다. <부드러운 좌익을 위한 회유곡>은 그 농담의 절정이다. <꿈의 메신저>에는 버려진 유조선을 개조하여 움직이는 무국적 도시를 건설하려는 소설가가 등장하는데 그런 도시의 건설은 바로 마사히코의 꿈이기도 하다. 마사히코의 소설은 워낙 독특해서 정상적인 코드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악마를 위하여>를 읽어두면 다른 마사히코의 소설을 이해하는데 한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아쿠마 카즈히도는 악마적인 내성을 가진, 분열된 자아로 세상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마사히코의 소설적 자아인 셈이다. 마사히코의 모든 소설은 아쿠마 카즈히도가 썼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39살에 자살한 다자이 오사무는 이른바 '퇴폐의 미학'을 보여주는 작가다. 그의 삶이나 소설적 행보는 우리나라 소설가 이상을 연상시킨다. 상처입은 예술가 소설의 전형인 <인간 실격>은 예민한 자아로 인하여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고 끝내 유리된 삶을 살다가 미쳐버리는 한 사내의 일대기로 그 자신의 정신적 자화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세상과 맞물리지도 등돌리지도 못하는 인간 내면의 풍경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이 소설은 패전 뒤 일본사회에 만연하던 허무주의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투신자살이라는 극적인 상황과 맞물려 지금까지도 일본 문청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소설적인 미의식

지극히 소설적인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오직 소설로만 가능한 이야기, 그것이 마루야마 겐지가 지향하는 소설이다. 마루야마는 일본 문단 내에서도 매우 구도자적인 소설 쓰기를 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의 에세이나 소설에서 드러나는 여성관이나 세계관은 나하고 맞지 않는다. 맞을 까닭이 없다. 수시로 여성을 무뇌아나 단세포 생물로 취급하는데 누군들 맞장구치고 싶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값진 데가 있다. '소설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건강한(?) 마초의 전형이다 싶은 그가 어떻게 이렇게 섬세한 문장을 쓸 수 있을까 의심이 날 정도로 그의 문체는 아름답다. 소설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훔치고 싶은 문체다. 우리나라 몇몇 작가들은 마루야마 겐지의 문장과 이미지를 그들의 소설에 차용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기도 한데, 그네들의 심정이 이해가 갈 정도다. 겐지의 소설 가운데 특히 문체가 아름다운 소설 가운데 하나가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다. 해변가에 사는 청년이 죄를 짓고 도망쳐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어릴 적 여자친구와 오토바이를 타고 고향을 떠났다가 되돌아오는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은 오토바이가 질주하며 보는 거리의 풍경이 내용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음에도 지겹거나 단조롭지 않다. 오히려 장편의 시를 읽는 것과 같은 감동이 있다.

아베 고보<모래의 여자>도 문청들에게는 필독서다. "8월의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인간의 실존을 생각하게 한다. 날마다 똑같은 분량의 모래를 퍼내야 살 수 있는 모래구덩이에 갇힌 남자의 삶은 읽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버석거린다. 시시포스의 신화를 연상시키는 어쩔 수 없는 반복의 삶도 가슴 메이지만, 몇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비로소 탈출의 묘안을 세운 남자가 그 방법이 탈출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탈출을 미뤄두는 마지막 대목은 특히 인상적이다. 정작 삶을 억압하는 건 희망 혹은 가능성이 아닐까. 잠재된 가능성이라는 건 사실 실현 여부가 불가능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희망도 없이 모래구덩이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희망을 안고도 모래구덩이에서 나오지 못하는 존재, 사실은 그것이 인간의 실존인 것은 아닐까.

여성작가들의 힘

일본 소설을 읽다보면 의외로 여성작가들을 찾기 힘들다. 남성작가들의 소설 위주로 번역이 된 것인지 실제로 여성작가들의 활동이 미비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나마 알려진 여성작가들이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야마다 에이미로 이른바 여자 하루키 3인방이다. 이들의 소설은 말랑하고 가볍고 감상적이다(이런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여자 하루키로 불린다는 것은 하루키의 강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건 아닐까).

소설이라기보다는 한권의 순정만화를 읽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특히 에쿠니 가오리가 쓰지 히토나리와 함께 쓴 <냉정과 열정 사이>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실연당한 사람들에게는 경전 같은 소설이다. 밀란 쿤데라가 소설 <향수>에서 '너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나는 네가 어찌 되었는가를 알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 고통'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소설은 그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네가(동시에 내가) 어찌하고 있는지'를 거울처럼 보여준다. 사소한 오해로 헤어지게 된 연인의 헤어진 이후를 각각의 입장에서 서술한 내용이다. 읽는 동안은 살을 에이는 감정선을 따라가느라 마음이 아린데 읽고 나면 실연의 고통도 사실은 판타지구나 깨닫게 해주는 것이 이 소설의 미덕이다. 그와 내가 맺고 있던 관계가 깨져서 아픈 것이 아니라 '아프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함으로써 아픔을 가져온 전후사정과 잘잘못 따위를 잊으려고 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관계의 쓸쓸함은 에쿠니 가오리의 최신작인 <호텔선인장>에서도 읽을 수 있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볼 수 있는 이 소설은 '호텔선인장'이라는 이름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오이와 숫자 2와 모자가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줄거리의 전부다. 서로를 받아들이고 느끼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설레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지만 그 감정들이 본질을 변화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야마다 에이미는 단편집 <공주님>에서 실연 대신 연애를 통해 관계의 불안정함을 묘사한다. 5편의 연애소설이 수록된 <공주님>에서 연애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그 사랑에 도취되어 있는 순간이 아니라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다. '죽음을 감추고 있는 여자는 남자에게 버림받지 않는다' (체온재기)라는 문장은 연애나 사랑은 상대에 대한 불안이 팽팽하게 이어져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신파 같지만 수긍이 간다.









일본 여성작가들의 연애소설을 읽다보면 어쩔 수 없이 유미리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유미리의 소설은 이들과 확연하게 다르다. 주제도 소재도 쓰는 방식도 다르다. 동포 2세인 그녀를 일본 작가의 범주에 넣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소설이 일본사회와 충돌하고 교류하여 형성된 정서적 기반을 근간으로 씌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본 소설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일본 소설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가족에 대한 강박, 민족적인 정체성이 끝없이 노출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러한 강박도 그녀에게 아쿠카타와상을 안겨준 <가족 시네마>처럼 비교적 초기작에서만 엿볼 수 있다. 이후에 보여지는 그녀의 소설인 일본사회 자체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렇더라도 다른 여성작가들과 주제의식이 많이 다르다는 점은 변함없다.

영화로도 제작되어 성공을 거둔 바 있는 <철도원><러브레터> (영화 <파이란>의 원작 소설)의 작가 아사다 지로도 폭넓게 사랑받는 작가 가운데 하나다.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이 몰락하는 바람에 야쿠자 생활까지 해봤다는 그의 밑바닥 체험이 녹아 있는 소설은 읽기 쉽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는 가족이 해체되고 파편처럼 남은 개인들이 홀로 살아가는 풍경을 자주 쓰는데 우울하고 쓸쓸하면서도 동시에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을 보면 본성이 착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장편보다는 단편이 훨씬 매력적인 작가다. 최근에 나온 아사다의 소설은 주로 장편이다. 단편으로는 <장미도둑>이 있지만 <낯선 아내에게>를 더 권하고 싶다.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의 경계가 없다고는 하지만 대중적인 감수성의 글로 시작했다가 어느 정도 인기를 모으고 나면 좀더 문학적인 수사법을 구사하려는 태도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자연스러운 전환이 아니라 의도적인 전환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법이다. <장미도둑>은 조금 더 문학적일지는 몰라도 '아사다'스럽기는 덜하다.

대중소설의 경쾌발랄함









소설이 농담처럼 가벼워지는 건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비슷한 추세다. 경쾌발랄함은 솔직히 일본 소설이 한수 위다.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에 대한 적서 차별이 없는 탓인지 그들의 대중소설에는 콤플렉스가 없다. 특히 재미있는 건 나오키문학상 수상작들이다. 이것저것 고민하지 않고 낄낄거리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읽고 싶다면 일단 나오키문학상 수상작부터 고르면 된다. 아쿠카타와상이 순수소설에 주어지는 문학상이고 나오키상은 대중소설에 주어지는 상이라는데 그 선정 기준이 유머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한·일 합작영화로도 제작된 <GO> (흥행에는 실패했지만)는 스스로를 코리언재패니즈라고 부르는 재일동포 가네시로 가즈키가 썼다. 조총련계 초·중학교를 다니며 느낀 일본사회의 차별을 딴청부리듯 경쾌한 문체로 그려냈다. 외형적으로 연애소설을 표방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연애는 단순히 남녀의 교감의 문제가 아니라(그건 문제될 것도 없다. 이 소설에서 남녀로서의 두 존재는 갈등의 여지가 없다. 그야말로 한눈에 반해 딱딱 들어맞은 그들은, 성별 존재로서는 전혀 갈등하고 있지 않다.) 다분히 언제가 그 기원인지 알 수도 없는 국적으로 이질화된 타자들간의 문제로 나타난다. 이 문제 앞에서 작가는 역사와 상황 속에서 개인은 떠돌아다니는 부초라고 말한다. 즉 개인은 민족이나 국가 인종에 매이지 않는 고유의 개체라는 뜻이다. 물론 부초라는 표현에는 뿌리내리지 못한 이의 서글픔도 어쩔 수 없이 묻어난다. 가볍지만 경박하지는 않은 것 또한 이 소설의 미덕이다. 비극이 정점에 달하면 유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정체성 혼란의 상황을 농담으로 풀어내기까지 작가가 거쳐간 심적 고통이 소설의 문체처럼 발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또 다른 소설인 <레벌루션 No3.>도 재미는 있지만 만한 깊이는 없어서 아쉽다.

역시 나오키문학상 수상작인 야마모토 후미오<플라나리아>도 재미를 전면으로 내세운 소설이다. 농담의 기저가 비극에 있다는 앞서의 명제는 이 소설에서도 유효하다. 재미있는 소설의 주인공들은 인생의 낙오자라는 공통분모를 안고 있다. 그러고보니 학창 시절에 반에서 제일 웃기는, 자처한 개그맨들은 모두 반에서 가장 가난한 아이들이었다. 슬픔과 웃음은 일종의 샴쌍둥이 같은 것일까.

물론 일본의 젊은 소설이 모두 경쾌발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2002년 아쿠타카와상을 받은 요시다 슈이치<파크 라이프>는 현대인의 일상을 보여준다. 전철을 타고 회사와 집을 오가며 가끔 회사 근처 공원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남자의 일상과 그 남자 주위 사람들의 가벼운 에피소드가 소설의 전부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일상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는 소설인데 한순간 아찔해진다. 끝없이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고,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지만 화자는 누구와도 관계맺지 않는다. 의도한 것도 아니고, 따돌림을 당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타인과 나 사이의 거리가 숙명처럼 몸에 배었을 뿐이다. 주인공을 비롯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삶은 지하철을 타고 가다 맞은편 창 어둠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느닷없이 조우했을 때처럼 낯선 동시에 익숙하다. 내 삶이 어떠하다고 말해주지 않으면서 어떠하다고 직시하게 만들어주는, 질투를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요시다 슈이치는 아쿠카타와상과 더불어 가장 대중적인 신인작가에게 준다는 야먀모토 슈고로상도 수상했다. 우리의 문학적 풍경 속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실 경쾌발랄하고 당당한 일본의 '대중소설'을 읽다보면 가끔 헷갈린다. 그들의 대중소설에서는 배다른 오빠가 조폭이어서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이 불치병에 걸리는 일도 드물지만 순수문학을 하는 작가가 대중적인 상을 받았다고 해서 경원하는 일도 없다. 이른바 대중과 순수가 경계도 모호하지만 서로 배타적이지도 않고 넘나듦도 자유로워 보인다. 우리 문학에서도 그런 게 가능할까. 쉽지는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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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오래된 삶 > 즐거운 병의 향연
Alice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거울 나라의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5
루이스 캐럴 원작, 마틴 가드너 주석, 존 테니엘 그림, 최인자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오래 기다렸던 책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단순한 동화가 아님에도 아이들이나 읽는 동화처럼 취급되어 제대로 된 번역이 이뤄지지 않았던, 판타지의 고전의 반열에서 급기야 동시대의 철학적 텍스트가 된 작품을 마주하는 즐거움은 그 기다림에 대한 반가움만큼이나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원작의 두 배는 될 듯한, 원작만큼이나 풍부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주석까지 상세하게 덧붙여져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주석자인 마틴 가드너는 앨리스의 원작 삽화가였던 존 테니얼의 알려지지 않은 삽화까지 찾아 수록해 놓았다. '결정판'이라는 말이 전혀 무색하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간 확인할 수 없던, {앨리스}에 숨겨져 있는 수학적 상징을 비교적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 왜 이 책이 디지털 시대라 불리는 이 시대에 '다시' 각광(이 책의 친절한 각주들을 보면 {앨리스}가 당대의 작가들의 작품에도 수없이 인용되고 있으며, 그들 작품의 상상력의 원천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아일랜드의 고집쟁이 제임스 조이스마저 어렵기 그지없는 책, {피네건의 경야}에 {앨리스}를 인용하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책 49쪽 참조)을 받고 있는지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즐거운 병의 향연'이라 할만한 루이스 캐럴의 아름다운 욕망 또한.......

{앨리스}는 디지털 공간의 '혼융' 혹은 '변화'의 속성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텍스트다. 접속 코드와 같은 구멍, 무한한 변화를 '몸'으로 보여주는 주인공 앨리스, 그리고 실재와 비실재, 현실과 비현실이 혼융되어 있는 공간 혹은 공간성. 너무 간단한 언급이지만, 이러한 속성 혹은 미덕 때문에 {앨리스}는 우리 시대의 작가들에게 열렬한 조명을 받고 있다.

촬영 기법이나 내용 등 거의 모든 면에서 SF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매트릭스'를 보면 우리는 이 점, 즉 {앨리스}가 어떤 방식으로 인용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어떻게 동시대의 텍스트가 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 네오는 검은 모니터(구멍)를 통해 전해온 한 문장, 곧 "흰토끼를 따라가라"는 문장을 통해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로 빠져든다. 세계의 모든 것이 실재가 아닌 허상일 뿐이라는 진리를 터득하는 계기가 된 것이 '구멍'과 '토끼'였던 것이다. 이는 앨리스가 비실재(판타지)의 경험을 통해 실재의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과 정확한 대칭을 이룬 채 일치한다.
같은 시퀀스에서 천재적인 형제 감독(래리&앤디 워쇼스키)은 {앨리스}가 지닌 이러한 현재성을 매우 적절한 비유 혹은 상징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또 다른 인용으로 나타난다. 다름 아닌 {시뮬라시옹}과의 병치. 문을 두드리는 흰토끼 일행에게 줄 CD를 네오는 현대의 고전이자 디지털적 세계에 대한, 또는 그러한 세계로의 변화에 대한 영향력 있는 저작인 시뮬라시옹(장 보드리야르)의 '구멍(책 속은 검은 사각의 구멍으로 보여진다)' 속에서 꺼낸다. 이는 {앨리스}가 단순한 캐릭터나 사건의 인용이 아닌 '매트릭스'라는 작품의 전체적인 구조 혹은 세계관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앨리스}는 과거의 어떤 책이 아니라 현재 이곳의 책으로 문화 속에 그려지고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의 작가 중 한 사람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걸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떠올려 보라. 조그마한 터널(검은 구멍)을 통해 비실재적 공간으로 들어가 '성장'을 하고 돌아오는 소녀의 이야기 말이다.
여담이지만, 이 책의 108쪽을 보면 같은 감독의 또 다른 걸작 '이웃의 토토로'의 명장면인 나무 위의 고양이버스와 너무도 유사한 삽화가 인쇄되어 있다. 하야오 역시 {앨리스}의 전체적인 세계와 함께 그 속의 디테일까지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우리의 작은 소녀 '메이'는 토끼처럼 희고 귀가 큰 작은 토토로를 따라 나무들로 이루어진 작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 나무 '구멍' 속에서 자고 있는 커다란 토토로를 발견한다).

어쨌든, 그러니, 이 '커다란' 현재의 고전을 읽는 것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더구나 이 책, {앨리스}는 한 위대한 환자의 아낌없는 사랑으로 태어난 작품이 아니던가? 그러니.......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출판된 이후, 비록 그렇게 불리고 있긴 있지만, 소녀 페티시즘은 '롤리타 콤플렉스'라기보다는 '앨리스 콤플렉스'로 불려져야 한다. 하지만 이름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페티시즘은 일종의 성적 전도 혹은 욕망의 전도다. 평범하지 않고, 일상적이지 않고, 일반적이지 않은, 그리하여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사유 속에서는 '변태'라는 이름으로 도외시되고 있는 전도. 하지만, 예술은 혹은 예술 행위는 결국 표현의 욕망과 표현된 것이 만나는 페티시즘의 장이 아니던가? 세계를 세계 자체로 표현할 수 있는 자,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보드리야르의 표현({사물의 체계})에 따르자면, 현대는 명명의 체계가 불가능할 만큼 급변하는 세계가 아니던가? 그러니 어찌 총체성, 주체의 완전한 표현이 가능하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페티시즘은 어쩌면, 가장 솔직한 욕망의 표현, 또는 표현의 욕망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캐럴은 소녀 '앨리스'에 대한 성취할 수 없는 욕망을 이 책 {앨리스}를 통해 성취(? 캐럴에겐 모르겠지만, {앨리스}는 말 그대로 성취라 할 수 있을 것이다)한다. 도무지 성취될 수 없는 그 욕망, 곧 사랑을 말이다.


어째서 그가 전도된 사랑을 하게 되었는지, 어찌하여 그러한 욕망을 갖게 되었는지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이다. 우리는 그저 그의 전도가 작품을 통해 재전도를 이뤄 예술로 승화되는 '카니발' 혹은 향연을 즐기면 그만일 뿐이다. 세계의 부조리와 그것을 통한 성숙을 어른이 아닌 친구의 마음으로 연인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기원하고 있는 한 중년 사내의 소녀에 대한 정성어린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면 그만일 뿐인 것이다. 병이라고 치부되고 있는 그 전도를 즐거운 병으로 만든 한  아름다운 환자의 향연에 행복한 마음으로 빠져들면 그 뿐인 것이다.
그러니 '롤리타 콤플렉스'건 '앨리스 콤플렉스'건 이름이 무어 중요할까.

오래 기다렸던 책을 드디어 읽었다. 읽었지만, 아직도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오래 오래 두고 두고 몇 번이고 읽어가며 환상과 사랑의 병에 빠져들고 싶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양소유({구운몽})가 꿈에서 깨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듯 즉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듯 우리의 현실을 더욱 치열하게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려나 이 즐거움을 이 병의 즐거움, 즐거움의 병의 향연을 함께 나누고 싶다. 아직도 예술적 환상이 우리의 삶과 사랑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책 속(pp.197-198)에서

그러므로 어서 와서 들으렴.
 가혹한 세월에 시달린 두려움의 목소리가
그대를 반갑지 않은 침상으로 부르기 전에.
 우울한 아가씨여!
우리는 단지 임종의 시간이 가까운 것을 알고 초조해하는
좀더 나이 든 어린아이들일 뿐.

집 밖에는 눈앞을 가리는 눈과 서리. 
 폭풍의 우울한 광기 -
집 안에는 벽난로 불빛의 빨간 열기와
 어린 시절 보금자리의 즐거움.
마법의 말들이 순식간에 그대를 사로잡으리.
그대는 미쳐 날뛰는 돌풍을 알아채지 못하리라.

비록 이야기 속에서
 한숨의 그림자가 가냘프게 떨릴지 모르지만.
‘행복한 여름날’은 지나갔기에,
 여름날의 영광은 사라졌기에 -
하지만 고통의 한숨도
우리 이야기의 즐거움을 시들게 하지는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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